완전 가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이 왔다.
적당한 날씨에 단풍도 있고 내 생일도 있고,
무엇보다 무더운 시간이 지나가고,
벌레도 사라지고 땀도 나지 않아서 좋다.
기후위기라 불리는 어마어마한 문제로 점점
짧아지고 있지만 그렇기에 이 계절이 더욱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날씨에, 정말 가끔 하면 재미난 일을 했다.
옛날 일기장 보기. 고등학생이던 2002년 오늘,
개천절에 나는 교실에서 자율학습 중이었다.
일기에 개천절이라기에 하늘이 정말 열릴 기미가
있나 틈틈이 하늘을 쳐다봤다는 글을 써놨다.
(과거의 나야, 잡생각 넣어두고 수학문제 하나라도 더 풀지 그랬니;;)
일기를 꾸준히 써온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나를 소환하는 일은 생각보다
즐겁다.
연휴 마지막날을 맞이하여 남편이 첫째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다녀왔다. 이제 막 아이돌을 좋아하기
시작한 첫째가 ‘아이브가 다녀온’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연휴 내내
매일 밤 12시에 프리패스(?)인지 하이패스(?)인지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티켓 구입에 도전했고
며칠을 실패한 후 드디어 성공한 게 오늘이었다.
천둥벌거숭이 둘째와 못 걷는 나를 두고 가려니
남편이 적잖이 걱정이 됐나 보다.
엄마가 싸주셨던 된장찌개를 데워 아침으로 먹고
최대한 내가 1층에서 움직이지 않아도 되도록
세팅을 하고 출발했다.
둘째는 아직 낮잠을 자는 시기이므로 낮잠 재우고,
영상물의 도움을 얻고 책을 무제한으로 읽어주며
자동차 장난감으로 잘 놀아준다면 이래저래 시간이
잘 갈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남편과 첫째가 출발하고 한 시간 만에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나는 인간이며,
고로 나는 망각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두 번째 육아이거늘 나는 어찌 이리 다 까먹었던가…
이 시기 아이들은 같은 책을 무한반복한다는 것을…
첫째 때도 계속 읽어주고 또 읽어주다 나중엔
세이펜에 녹음해 줬던 게 뒤늦게 기억났다.
‘세이펜…. 이 어딨 더라?!?!’
일단 카페인 수혈부터 하자!
점심으로 먹으려고 샌드위치, 아이 간식으로 줄
빵 등을 커피와 함께 주문했다.
주문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받고 나니 아차 싶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샌드위치 외에 나는 먹지도 않을 감자빵과 와플과
추로스를 한꺼번에 다 시킨 것인가?
카페인 부족으로 판단력이 잠시 흐려졌던 건가?
심지어 샌드위치도 너무 커서 반 밖에 못 먹었다.
둘째 낮잠을 막 재웠을 무렵, 성치 않은 몸으로 혼자
애 보고 있을 딸이 걱정된 엄마아빠가 갑자기
오셨다. 맛있게 먹었다는 엄마표 된장찌개와
김치제육을 양념해서 들고 오셨다.
그리고 누군가 프랑스 루르드 성지에서 사다 줬다는
성수를 들고 와 내게 주고 기도를 하시더니
15분 만에 일어나 가셨다. 둘째가 거실 한복판에서
자고 있으니 이때 조용히 나도 자라며 배웅도
안 받고 부지런히 가셨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
엄마가 다시 가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둘째가 일어났다.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엥… 뭐야; 너 한 시간 잔 거야??’
점심을 거르고 자더니 배가 고팠나 보다.
급히 고등어 한 마리 구워 밥을 먹였다.
요즘 우리 집 식단은 늘 단일메뉴다.
놀이공원에 간 남편과 첫째는 7시간쯤 지나서 왔다.
아이는 너무 신나 있었고, 남편은 돌아오기 무섭게
둘째를 데리고 다시 나갔다. 종일 집에서 답답했을
둘째와 또 한두 시간을 외출한 후 돌아왔다.
점심에 샌드위치 반을 먹었을 뿐인데 배가 고프지
않아 저녁은 먹지 않았다. 위가 줄었나 배가 안
고프다는 헛소리를 시전 했으나 결국 배고파서
9시에 오트밀크 한 팩 먹었다.
드디어 내일은 평일이다.
내가 다니던 병원에 다시 방문해 볼 예정인데,
당일진료예약은 안되는지라 걱정이 된다.
중간에 다른 병원을 다녀왔지만
계속 마음이 불안했던 건 어쩌면 그 의사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진료 봐주던 분이라 해서 뾰족한 수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지금 내겐,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오늘은 일기 내용이 참… 오락가락하네. 내 맘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