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X

스파이크 리 감독(1993) / 미국

by 정작가


미국에서 흑인 해방 운동가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 마틴 루터 킹 목사다. 대략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을 계승한 인물 정도로 알고 있지만 말콤 X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낯설다. 이전에 TV를 통해 언뜻 이름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도 책을 읽고 나서다.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사건별로 근현대 세계사를 다룬 책이다. 이 책에서 유독 인물 위주로 사건을 구성한 사람이 두 명 있는데 아돌프 히틀러와 말콤 X가 그들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워낙 알려진 인물이라 재론할 이유가 없겠지만 말콤 X는 제법 생경한 인물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야말로 보무도 당당하게 흑인을 핍박했던 백인들에 대한 적개심 가득한 어투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알고 보니 그 장면은 <말콤 X>라는 영화의 첫 장면을 인용한 것이었다.


<말콤 X>의 첫 장면은 말 그대로 강렬하다. 화면에서는 성조기 나오고, 음성이 들려온다. 목소리는 영화의 주인공인 말콤 X이다. 그의 어조는 단호하다.


형제자매여, 저는 오늘 백인을 고발하러 나왔습니다. 백인을 사상 최대의 살인자로 그리고 납치자로 고발합니다. 백인이 평화와 안정을 세웠다고 볼 사람은 없습니다. 백인이 가는 곳은 어디든 폭력이 난무했고, 사정없이 파괴됐습니다. 저는 백인을 사상 최대의 납치범과 살인자로 고발하며 백인을 최대의 강도범과 노예주로 고발합니다. 백인을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못된 자로 고발합니다. 백인은 이 죄목들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제가 산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미국인이 아니고 바로 미국의 희생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스스로 온 게 아니었으며, ‘흑인이여 같이 가서 미국을 세웁시다’가 아니라 ‘검둥아 배에 타거라’‘너희를 끌고 가서 미국을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우리는 미국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저도 아닙니다. 2천2백만 흑인 중 한 명으로서 미국의 희생자일 뿐입니다. 민주주의는 본 적도 없습니다. 조지아주 목화 농장에도 결코 민주주의는 없었으며 뉴욕, 디트로이트, 시카고의 빈민가에도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우린 민주주의를 본 적이 없고, 오로지 위선만을 봤습니다. 우리에게 ‘미국의 꿈’은 없었고, 체험한 건 악몽뿐입니다.


이후 연설은 끝나고, 환호하는 관중의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성조기를 태우던 불꽃은 ‘X’라는 형상을 남기며 꺼져간다. 사실 3분도 안 되는 이 장면이 영화 ‘말콤 X’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콤 X는 당시 흑인들이 처한 현실을 뼈아프게 느꼈고, 분노에 찬 어조로 말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역사적으로도 노예제를 폐지하고, 민주주의의 본령을 마련한 미국에서 이렇듯 처절한 절규에 가까운 직설을 하는 지도자가 탄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영화를 보면 그의 탄생과 성장기에 대한 장면을 엿볼 수 있다. 이발소에서 고통을 참아가며 곱슬머리를 펴는 눈물겨운 사투도 흑인 차별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한 방편임을 자각했던 말콤 X. 그는 당시 대통령조차도 암살당하는 엄혹한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의 인권과 백인들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무장하여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용기와 뚝심을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암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운명이 같은 유색인종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있다. 말콤 X의 급진적인 성장을 시기한 종교 내부자들의 음모로 위대한 역사적 인물은 그 생애를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말콤 X 인생의 궤적을 훑어간다. 성장기 할렘가에서 마약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백인 여자를 사귀었다는 이유로 가중 처벌되어 형을 살면서 인연이 된 회교도를 만나 개과천선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둠의 세계를 떠돌다가 목사가 되어 흑인들에게 진리의 빛을 전파하는 그는 가족을 향해 가해지는 각종 테러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흑인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테러범들의 암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다. 때론 격정적으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백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기도 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 흑인들의 대변자로서 당당하게 살다 간 그의 인생역정에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아직도 영화 속 그의 목소리는 결기 하듯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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