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와 물레로 이룩한 질그릇 혁명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단계에서 역사를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워낙 문헌상으로도 정확한 기록이 없고, 고문서를 토대로 역사 형성 과정을 유추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기존의 학설에 의존해야만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장에서 언급한 삼한과 원삼국시대 또한 그런 기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규정하고 있는 삼한과 원삼국시대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자.
삼한시대이면서 삼국이 태동하는 시기였고 낙랑이 있었다. 이 복잡한 고대국가 태동기를 고고학에서는 ‘원(原)삼국시대’라고 부른다. 삼국으로 정립되어가는 기원의 단계라는 뜻으로 문헌사학에서는 삼국시대 초기라고 하지만 아직 부여, 삼한 등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삼국시대라는 시대개념으로 부르는 것이다.
기존 사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삼한의 대륙기원설에 따르면, 대륙에 위치해 있던 삼한이 세력 약화로 인해 한반도 남쪽 지역으로 그 세력이 좁혀지게 되었는데 그전에 쓰던 지명을 가져다 그대로 쓰게 된 것이 삼한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여기서는 주류 학설에 근거한 역사적인 내용을 토대로 문화사적인 접근을 한 것이기에 그것에 따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그렇게 규정된 원삼국시대는 본격적인 철기 시대 도래를 알렸고, 사회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무기와 농기구에서 철의 사용이 빈번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의 사용은 사회상 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촉진시켰고, 저자의 주장처럼 장묘 풍습이 바뀔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면 생활 문화 전반이 철기의 도입으로 인해 엄청난 변혁의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삼국시대 대표적인 유적지로 창원 다호리 유적, 경주 조양동 유적, 영천 어은동 유적 등이 있지만 그래도 창원 다호리 유적을 부각하는 것은 이곳에서 다량의 칠기 유적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칠기는 일반적으로 옻칠을 한 나무 그릇을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옻칠과 같이 검은 잿물을 입혀 만든 도자기를 말한다. 이 외에도 각종 무기, 공구, 쇠뿔손잡이 항아리, 허리띠 고리 등이 출토되었는데, 한나라 청동 거울, 오수전 등의 출토로 낙랑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준다는 저자의 시각도 있다. 한편, 한국식 세형동검이 칠기 칼집에 들어있는 상태로 출토되어 청동기 문화가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주장도 접할 수 있다. 다호리 유적 발굴에서 다소 특이한 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붓, 손칼, 목찰 등으로 기록 문화의 흔적을 발견해 냈다는 사실이다.
창원 다호리 유적 외에도 원삼국시대의 유적지로 경주 조양동, 영천 어은동, 광주 신창동 유적지를 들 수 있다. 이 중 경주 조양동 유적이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무덤의 발견에 기인한다. 묘제가 널무덤에서 덧널무덤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이 무덤의 발견으로 원삼국시대라는 시대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이 유적의 가치는 재조명될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천 어은동에서 발굴된 유적의 특징을 보면, 정교한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을 보면, 시대의 과도기적 특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청동허리띠 장식은 저자의 표현대로 ‘대단히 기능적이면서도 품위 있게 조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내몽골 지역과 낙랑 무덤에서도 출토되었다고 해서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이라고 보는 저자의 견해에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역으로 그 일대의 강역을 원삼국시대의 영역으로 본다면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의문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시기에 발견된 역사 유적들은 전국에 퍼져 있는 만큼 삼한시대의 유적인지 고구려, 백제, 신라 초기의 유적인지 명확하기 구별하기 힘든 만큼 원삼국시대의 넓은 시대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기는 할 것이다.
저자가 언급하다시피 원삼국시대 도기의 특성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종래의 민무늬토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이 우수한 회색 연질도기가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원삼국시대의 도기가 획기적인 기술 혁명의 결과물로 추앙받는 것은 밀폐된 가마를 사용해 화도를 올려 좀 더 견고하게 도기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와질 도기라고 불리는 회색 연질도기가 등장했던 것은 이런 기술적인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삿무늬도기항아리의 특징은 몸체에 삿무늬나 격자무늬를 띄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무늬가 있는 삿자리나 천을 대고 방망이로 다져진 무늬에서 기원한 것이다. 와질도기는 원삼국시대 도기 중에서 기술이 가장 발달하고 조형이 세련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삼국시대 유적지에서 주로 발견된 와질도기는 기형이 다양하고 질도 우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쇠뿔손잡이항아리와 오리모양도기를 보면 흔히 보기 어려운 기형적 형태에 약간은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쇠뿔손잡이항아리는 명칭 그대로 긴목 항아리 형태에 쇠뿔 모양 손잡이를 붙인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 도기로서는 이채롭게 보일 정도라는 표현에 공감이 간다. 오리모양도기는 우리 도자사에서 첫 번째로 나타나는 상형도기라 하니 그 가치를 개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기존 오리 형태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볏을 추가하고 눈을 옆으로 돌출시키는 등 추상적인 변형을 가하여 탄생한 도기니 만큼 그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삼국시대 도기는 우리나라 도자사에서 고려청자, 조선 분청사기, 조선백자와 함께 도기의 가치를 배가시켰던 도기라는 평가가 있다. 고구려 도기는 낮은 화도에서 구워냈다는 특징이 있지만 신라, 가야 도기와 계통도 다르고 발굴된 양도 많지 않다고 한다. 그나마 대표적인 명작으로 치는 것은 서울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네귀항아리>가 있다. 이 항아리는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청동네귀항아리>와 궤를 같이하는데 생김새는 약간 상이하지만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현대적 감각에 뒤지지 않을 만큼 세련된 예술미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집모양도기>는 수수한 문양과 형태가 마치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장난감처럼 익살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특징점이다.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그만큼 고구려 도기는 발굴된 유물이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백제 도기의 특징을 저자는 ‘부드럽고 우아한 고전미, 그리스 미술에 깊은 영향을 준 이오니아 미술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움’으로 정의한다. 고구려의 강인함, 신라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특성으로 백제의 우아함을 설파하고 있는 저자는 백제가 외래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의 개방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저자가 언급한 대로,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호자>와 공주와 부여에서 출토된 <나팔모양그릇받침대>는 백제의 고유한 예술성을 바탕으로 이국의 문화를 조화롭게 결부시킨 예술적인 조형미를 갖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도기와 가야 도기는 삼국시대를 통틀어 양과 질적인 면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월등히 앞선다. 출토된 양도 엄청나기 때문에 도기의 생산 연대기를 생성기, 발전기, 난숙기, 쇠퇴기로 나누어 구분할 정도이다. 신라 · 가야 도기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유물로는 다음과 같다.
굽다리접시는 신라·가야 도기를 대표하는 기종으로 조형상 매력이 높다란 굽다리에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특히 양식적 변천이 뚜렷이 나타나다 종국에는 굽다리 접시 형식자체가 사라질 정도로 세월이 부침이 심했던 도기의 종류라고 할 수 있겠다. 긴목항아리는 굽다리접시와 함께 신라·가야 도기를 대표하는 기형으로 알려져 있다. 국물이 있는 음식을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도기는 뒤로 갈수록 장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특성이 있다. 그릇받침대는 항아리를 얹는 기대 또는 감대라고 한다. 원통 모양으로 무언가를 받드는 기형인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도기치고는 그 예술성이 뛰어난 형태를 지닌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 이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방울잔은 아가리가 넓은 잔을 올려붙이고 아래에 굽다리를 단 것으로 방울을 속에 넣어 술을 담아 올리면서 방울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아 제관이 사용하던 물품으로 유추할 수 있는 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외에도 손잡이잔, 뿔잔과 받침대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던 도기들도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이 중에서도 상형도기는 이형도기라 하여 다채로운 모양의 도기들이 많다. 도판을 보면 서수모양도기, 기마인물모양도기 등도 볼 수 있는데, 한때 국사책 표지를 장식했던 역사적 유물이라는 점에서 살펴보면, 그만큼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예술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우장식항아리>라는 유물을 보면, 장식 도우가 항아리에 예술적 감각을 배가시키는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도우는 종종 독립적인 형태로도 출토되는데 그 자체로서도 미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도우 장식은 단순히 장식적인 기능에 머물지 않고 스토리텔링 효과를 배가시킨다는 측면에서도 도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일본의 스에키 – 일본 토기- 는 도기의 질과 기형이 가야 도기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하다고 한다. 이는 스에키를 생산한 곳이 가야에서 온 일명 ‘도래인’으로 불리는 이들이 최초로 정착했다는 측면에서 한반도의 영향권 하에 있던 일본 도기의 역사를 재편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