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블루 화이불치의 미학
백제의 역사는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의 시대로 나뉜다. 이런 구분은 수도의 천도를 기점으로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이 역시 기록에 근거한 것이지만, 막연한 기록을 토대로 특정 지역이나 유물의 속성을 확정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가 백제의 건국을 언급하면서, '온조왕 15년(기원전 4)경에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처음 도읍으로 삼은 위례성은 대개 풍납토성으로 생각된다' 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생각된다'로 끝나는 문장은 이후에도 몇 번이고 이어진다. 뭔가를 확실히 규정하기 쉽지 않을 때, 이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직면하는 한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실증사학에 목을 맨것도 그렇다. 우리 고대사 연구에 문헌이나 유물로 설명할 수 없는 확실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사료만 가지고 역사를 재단할 수 없는 상황이니 다양한 관점에서 의지를 가지고 접근할 이유는 충분하겠다.
25년 전, 대서특필된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을 이용한 ‘구석기시대 조작 사건’은 실증만을 고수하는 역사적 관점이 어떤 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한편,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문헌적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유물을 토대로 이를 유추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수용해야 하는 것도 풀어야 할 과제다. ‘백제가 고구려의 한 갈래로 출발했다는 사실은 서울 석촌동고분군의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이 증명한다’고 저자가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또한 '장군총을 연상하는 거대한 규모의 계단식 돌무덤을 보고 왕족의 무덤으로 생각된다’고 기술하는 것도 역사의 유물 분석을 통한 유추 과정 속에서 맺어진 결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움무덤과 독무덤에 대한 내용에서도 확정적 단어에 대한 사용을 자제하려는 저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오래된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방증한다.
한성백제 시기는 웅진, 사비 시대와 비교하여 국력이 가장 강성하던 시기라 외래문화의 대한 개방성도 남달랐고, 그로 인해 문화도 융성하게 꽃필 수 있는 토양이었다.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에서 금귀걸이와 중국제 청자가 출토된 것도 이런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한성백제가 웅진으로 천도를 하게 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보면,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어졌던 천도 과정은 의지라기보다는 국력 쇠퇴로 인한 불가피한 결정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반면, 사비성 천도는 기존의 비좁았던 수도의 입지를 확장하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비 백제 시절의 묘제 연구는 적대국인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수용적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비록 영토를 두고 자웅을 겨루는 상황이긴 했지만 문화를 받아들이겠다는 측면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사신도와 연꽃무늬와 같은 유물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문화의 중흥이 개방성에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백제의 문화는 삼국 중에서도 그 가치가 뛰어난데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기록이 있다. 저자가 인용안, 바로 《삼국사기》에 실린 표현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이 구절은 백제 문화의 속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삼국 중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의 특징은 각각 고분 미술, 금속 공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의 융성기를 맞이했던 백제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령왕릉이라는 사실은 역사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렇게 백제 문화에 대한 특성이 담보될 수 없었던 이유는 백제 또한 고구려처럼 고분 미술이 절정을 이루었지만, 일제의 도굴과 무분별한 발굴로 인한 피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메이지유신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과거 이런 행태를 보였던 이유는, 서양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들여온 선구안적인 시각이 있었음에도 이를 체화시키지 못하고 외부 문화의 형식적인 부분만을 받아들였던 이유가 크다.
학술적 가치와 발굴 과정의 한계로 인해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의 유물 발굴사에서 최고의 발견과 최악의 발굴이라는 명암을 가지고 있는 백제의 대표적 유물이라고 할수 있다. 고분이 발달한 백제에서도 많은 고분을 볼 수 없는 것은 일제의 영향으로 인한 도굴 피해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은 저자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고분 발굴에서 역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무령왕릉 하면 무덤의 구조가 떠오른다. 널찍한 고분의 풍경은 익히 교과서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부분이라 이를 구성하는 벽돌의 무늬에 대한 감식안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민무늬, 연꽃무늬, 사방연속 마름모무늬 등이 조화를 이룬 구조적 배열의 양상을 통해 공간의 미학적 발견을 추적해 나간다면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백제 고유의 미를 돌출할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여기에 등장하는 서수와 매지권은 낯선 유물이다. 서수는 상상의 동물로 짐승의 도상을 한 무덤 지킴이다. 여기에서도 저자는 이를 중국의 진묘수와 다른 모습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저자가 앞서 무령왕릉 무덤이 ‘중국 남조의 벽돌무덤을 본받은 것이지만 백제만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 벽돌무덤방’이라는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이런 표현은, 그 유물의 진위를 떠나 우리의 문화가 중국에 복속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많다. 금관모 장식을 비롯하여 금귀걸이, 금목걸이, 금뒤꽂이, 은탁잔, 팔찌, 청동거울 등이 있다. 도판 사진을 보면, 그 예술성이 현재 디자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그 정교함과 미적 감각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은탁잔과 은팔찌에서 풍기는 은색 빛의 고고함과 중후함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고아한 자태를 드러난다.
금동이 출토된 고분에는 나주 반남고분군 신촌리 고분, 익산 입점리 고분, 공주 수촌리 고분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독무덤이다. 나주 반남의 영산강 유역의 고분군에서 주로 발견되는 독무덤은 독을 활용하여 매장을 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개인적으로, 2017년 백제한성박물관에서 열린 <영산강 옹관의 한성나들이>라는 전시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때 큼지막하게 전시관 한 편에 자리했던 옹관이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3세기부터 6세기에 조성된 유물이라고 하니 감회가 새로울 따름이다.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금동관모와 금동관은 언뜻 보면 신라 시대의 유물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도판을 보면, 유물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한 측면이 있어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발견된 관옥과 구슬옥은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게 옥을 예술적 소재로 사용했던 선조들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중국의 도자기를 보면, 한 시대의 유물이 꼭 생산 지역에서만 출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유물 분석을 통해 문화적인 교류의 역사를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당시의 생활상을 유추해 본다면 예기치 못했던 역사의 일면을 돌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백제는 주변국인 고구려, 신라, 가야, 왜와도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였다.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고구려에서는 벽화 무덤, 신라의 황룡사 건설에 기술자 파견, 가야와의 도기 문화 교류 등은 백제의 문화 다양성이 어디서 연원 했는지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왜와의 교류에서 불교를 전하고, 공예품을 전해주기도 했는데 일본 속의 백제 공예품으로 여기에서 언급된 것이 칠지도와 상아바둑알이다. 칠지도는 근 15년 전, <근초고왕>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가치를 살핀 적이 있다. 도판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칠지도는 도의 형태치고는 다소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지금도 일본에서 칠지도는 국가유물급 대우를 받으며, 당시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는 핵심 유물로 자리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논쟁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일본 내에서도 칠지도의 위상이 남다르다는 사실은 확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백제 유물로서 일본에 남아있는 상아바둑알과 바둑판은 당대 문화 교류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