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 금속공예
신라의 고분은 현시점에서도 우리나라 유적, 유물사에서 실체적인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자리하고 있다. 경주를 방문한 여행객들이 규모가 큰 고분에 감탄하고, 화려한 신라의 유물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만큼 한국사에서 신라의 유물이 미치는 영향력이 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장에서는 ‘고분을 통해 본 신라의 역사’라는 제하에 이사금 시기, 마립간 시기, 신라왕 시기로 나누어 고분의 특징과 세부 사항을 고찰하고 있다. 고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글을 대할 때면 느끼지만 이 시기에는 유적과 유물 간의 명확한 인과관계를 돌출하기가 어려워 단편적으로 유물을 소개하고 그 특징을 살피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또한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저자의 인식 수준과는 상관없이 실증적으로 검증할 만한 유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유물의 수가 많더라도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규명할 만한 근거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간단히 소개하는 선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실증사학의 한계는 인간의 고차원적인 문화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단순히 실체적인 유물의 존재 유무차원에서 바라본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장의 첫 장을 넘겨보면, 다음 장에서 여러 개의 신라 고분을 담은 도판을 확인할 수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아래에 펼쳐진 제법 큰 규모의 무덤이 즐비한 사진을 보면, 당시 신라왕조의 세력이 한국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장의 처음은 ‘고분을 통해 본 신라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크게 신라의 역사를 이사금 시기, 마립간 시기, 신라왕 시기로 구분한다.
‘이사금 시기’의 고분 문화 유물의 특성을 살펴보면, 오리 모양도기가 상징유물이고, 묘제는 길쭉한 덧널무덤, 부장품으로는 도기와 곡옥, 구슬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기원전, 후의 시기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차원의 유물도 많지 않을뿐더러 설사 그 유물을 해석하기 쉽지 않은 한계도 지니고 있다.
‘마립간 시기’의 고분으로는 황남대총, 천마총,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등을 들 수 있다. 이 고분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구조를 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는 크고, 부장품으로 금관, 금귀걸이, 금목걸이, 옥가슴걸이, 금허리띠, 금신발 등 화려한 장신구와 도기를 찾아볼 수 있다. 저자가 기술하고 분석해 놓은 내용을 토대로 살펴보면, 아마도 이 시기가 신라 예술이 최정점으로 치달았던 시기라고 유추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의 고분군이라든지 화려한 금관이 대분 이 시기의 유산이라고 한다면 이 시절을 신라 역사상 가장 빛나던 시기로 규정한대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신라왕 시기’ 고분 형태는 마립간 시대와 차이를 보인다. 대형 고분은 사라지고, 껴묻거리도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르다. 고분의 형태는 돌방무덤이다. 이런 저자의 분석을 토대로 추해 보면,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신라의 쇠퇴기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분 발굴에는 두 가지 명암이 있다. 하나는 과거의 유물을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유물을 발굴하여 그 가치를 후대에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저자가 기술한 대로라면 일제는 1910년에 이미 100호 무덤을 발굴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국의 무덤이 아닌 식민지 나라의 무덤을 마음대로 파헤치던 이런 일본의 행태는 문화사적으로 유물 발굴의 주체를 훼손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건물 증축 공사 중 우연히 발견한 유물이라면 그 발굴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겠지만 무작정 무덤을 발굴했던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를 측정하기보다 발굴을 통해 재정적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가 클 것이다. 이를 우려하는 저자의 인식이 묻어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금관총은 정식 고고학자에 의한 발굴이 아니었고, 이미 파괴된 상태에서 발굴했기 때문에 유물의 출토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금관을 비롯하여 금팔찌 12점 한 세트, 금허리띠. 금동신발, 유리그릇, 각종 마구 등이 출토되었고 곡옥 등 각종 구슬만 3만 점이 나왔다. 총 4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당시로서는 까맣게 잊고 있던 신라 문화의 전수가 세상에 드러나는 일대 사건이었다.
저자가 기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문화재 관리 상태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국운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문화재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거니와 그런 학제적 연구를 할 수준도 되지 않았겠지만 수많은 도굴꾼들로 인해 당시 많은 무덤이 훼손된 상태에서 유물을 출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존재하긴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신라 문화의 전수가 드러났다’는 표현을 살펴보면, 당시 일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여지도 있어 엄밀한 감식안이 요구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신라 고분의 발굴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에 많이 이루어졌다. 당시 일제가 만들어 놓은 일련번호를 아직까지 쓰고 있는 것은 이후로도 문화재 재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견도 없지는 않다. 단지 관리 차원에서 붙인 숫자에 의의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제가 행했던 수많은 행적에 비춰볼 때 훗날 친일 사학을 맹종하던 역사 학자들에 의해 정설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기록을 찾아보면, 해방 이후에 국보 1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라는 얘기도 있지만 당시에도 한글이나 훈민정음 등 인류문화사적 측면에서 국보 1호로 정할 유물이 실재하던 상황이고 보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신라고분 발굴의 역사’라는 장을 보면, 금관총 발굴 이후 본격적인 고분 발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분 발굴의 역사에서 일제가 유물을 대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금령총에서 금관이 나오고 2년 뒤인 1926년에는 일본인 고이즈미 아키오 주관 아래 서봉총을 발굴하였다. 발굴 동기는 인근에 있는 경주역에 기관차고를 지으려고 하는데 대지를 매립할 많은 흙과 자갈이 필요하자 고분 하나를 파게 된 것이다.
이런 고분 발굴 상황은 일제가 숭례문 주변에 철길을 놓고, 조선의 역사와 얼이 담긴 궁궐 근처에 조선총독부 설치한 전례에 비추어 볼 때 발굴이 아닌 유물 파괴 현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저자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고이즈미가 평양박물관 관장이 되어 자신이 일찌감치 발굴했던 서봉총의 금관과 장신구를 대여받아 특별전을 가지면서 당시 평양기생에게 이를 패용하게 한 이유로 당시 직에서 물러난 이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렇듯 일제 차원에서 한국의 문화와 유산을 보전한다는 차원보다는 그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 관점에서 유적과 유물의 가치를 평가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합리적인 판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표면적으로는 선진문명을 받아들인 문명국을 표방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문화적 심미안이 결여된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제의 고분 발굴이 주는 교훈은 우리나라가 해방을 한 뒤의 고분 발굴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천마총 발굴 사례에서 보듯이 ‘봉토의 남쪽 면을 절반으로 잘라 내부를 관람토록 해놓았다’는 내용을 보면, 역사적 유물을 대하는 인식이 일제 시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결정이 알 권리 차원인지 유물 훼손인지 따져볼 이유는 충분하다. 당시 우리나라의 국력 수준으로 비춰볼 때 유물 발굴을 뒤로 미루고, 문화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의식 수준이 고양된 시점에서 이를 발굴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는 것은 비단 필자의 심정만은 아닐 것이다.
신라의 고분 미술을 다루는 장에서는 금제품이 장신구로 자리 잡는 과정을 신라의 지리적 여건에 비추어 통찰하고 있다. 이슬람의 기행문인 크루다지바의 <도로와 왕국 총람>을 인용하면서 신라가 금이 풍부하다는 사료를 제시한 것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신빙성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실증적 논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금의 세공기법인 누금세공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신라가 ‘금의 왕국’이라는 사실을 직관하게 한다. 과거 일본에서 신라를 가리켜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로 표현했던 것을 인용하는 대목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의 황금’이라는 특별전이 열린 예시를 들어 보인 점은 저자의 논지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신라 시대 유물을 대표하는 금관은 고분 발굴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이다. 제시된 도판에는 다양한 형태를 띤 금관을 볼 수 있다. 도판을 보면, 검은 배경에 금관이나 장신구들을 고화질의 큼지막한 사진 형태로 몇 장의 지면을 할애하여 배치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진 구성은 마치 지척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유물을 설명하고 의의를 고찰하는 텍스트 차원의 접근보다 직관적으로 유물의 가치를 검증할 수 있는 독자의 선택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도 유용하다. 여러 사진 중에 금관과 관식은 직접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았던 유물이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더욱 정감이 간다.
소개된 금관 사진을 보면, 모두 비슷한 형태의 금관처럼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형태가 조금 다른 것도 있지만 미학적인 관점에서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고 하는 것이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저자는 각 금관 별로 유물사적인 관점에서 금관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피력한다. 또한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금관과 관련된 주장은 물론 그와 관련된 사료도 언급하며 최대한 많은 정보를 독자에게 제공하려는 의지도 엿보인다.
껴묻거리 장신구는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힌 장신구를 말한다. 저자가 도판과 설명으로 제시한 유물을 살펴보면, 드리게, 관모와 관식, 고리장식긴칼, 금귀걸이, 팔찌, 목걸이와 가슴걸이, 곡옥, 금동신발 등 그 종류와 다양성에서 이전에 소개했던 유물의 질적, 양적 수준을 가볍게 압도한다. 이는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사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유물의 도래를 암시하는 표식으로 삼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중에서도 32번 도판 ‘가슴걸이 출토상태’를 보면 부분적으로 훼손된 유물임에도 그 가치를 검증하는 것이 유물사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토 당시의 보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물의 발굴 지점을 직시한다는 측면에서도 유의미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겠다.
저자가 천마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길지 않다. 다만 천마총이라 불리게 된 유래가 천마도에 기인했었다는 설명은 도판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결코 짧지 않은 여운을 남겨준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수입 공예품에 대한 언급에서 은잔과 팔찌, 장식보검, 유리 제품에 대해 기술한다. 이런 수입 공예품에 대한 기술은 당시 신라의 교역국에 대한 정보를 통해 역사,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인류의 지정학적 한계를 벗어난 문화교류의 장을 이해한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 특히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장식 보검은 검의 형태가 온전히 보존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직관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게 한다. 필자는 이것이 신라 시대의 유물인 줄로 알았지만 ‘5세기 중앙아시아 소그드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는 수입품의 일부라고 하니 얼마나 유물에 대한 감식안이 부족했는지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외에도 출토된 수입 유리 공예품을 보면, 당대의 인류사에서 이런 예술품 생산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믿겨 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감각에서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제품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