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궁궐과 산성에 남은 자취들
이 장의 특징은 부제가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사라진 궁궐과 산성에 남은 자취들'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과거의 역사를 해석할 여지를 찾는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시대에 온전한 건축물과 토목술을 연구할만한 유적과 유물이 충분하지 않기에 저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파편적으로 분절시켜 그 가치를 조명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건축물의 특성을 유물과 터의 흔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대의 역사를 조망하는 과정에서 이를 해석할만한 유적과 유물, 사료를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가 각 유물별로 연구 과제를 수행한 것은 자구지책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는 주체적인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을 터이고, 그러다 보니 타국의 사료에 의존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모든 것들을 진실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다양한 유물과 사료, 현대의 기술이 가능한 방식 등으로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전체 역사를 조망하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한층 세밀한 역사적 실체를 규명할 수 있을 터이지만 여전히 한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연구성과를 단편적인 식견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고구려의 궁성은 오녀산성, 국내성과 환도산성, 안학궁과 대성산성, 장안성, 아차산성 등이 부분적으로 자취가 남아있다. 이 중에서 안학궁은 1958년부터 이루어진 대대적인 발굴로 제법 그 규모와 위치, 해자 여부, 도로포장 등이 밝혀졌다. 이런 발굴의 성과로 조선의 궁궐과 견주어도 상당히 큰 규모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 세력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객관적 사료로서도 의미가 크다.
백제의 건축에서 도성과 궁터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궁궐터와 건물도 자취를 통해 그 위치를 겨우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웅진 시절의 도성이었던 웅진성(지금의 공산성), 천도한 사비성은 그 자취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저자는 기존의 자취를 토대로 유물을 추적해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를테면, 익사 미륵사 석탑과 정림사 오층 석탑의 모습에서 백제 목조건축의 전체적 형태를 유추해 보려고 한 시도 등이 그러한 예다.
저자가 신라의 건축과 산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린 결론은 중국과 일본의 평지성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산성의 특징을 기술한 대목이다. 이는 사찰이 산사(山寺)가 되면서 자연 지형적 특성을 살려 건축미로 발전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내린 결론이다. 이런 산사가 정착된 시기가 고려 이후의 기간이라고 상정해 볼 때, 삼국시대 성곽의 특징으로 자연미와 인공미가 결합된 방식이 이보다 앞선 시절의 경향이었다고 한다면 이런 표현은 다소 선후가 뒤바뀐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징들을 토대로 신라 산성의 흔적들을 찾고 이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고대 성벽의 특성을 돌출해 낸 것은 의미 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공공 건축물로는 유일한 첨성대를 기록하는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신라 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토대로 이 시기의 역사적 가치를 돌출해 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런 건축학적으로 유려한 유적의 유물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삼국시대의 건축 부재라는 유물사적 발견으로 이어진다.
저자가 삼국시대의 건축 부재에 천착하게 된 것은 본문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고대 삼국시대의 왕궁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진술과 궤를 같이한다. 전체적으로 궁의 구조를 조망할 수 없는 건축물은 없으나, 건축 부재를 토대로 관련 정보를 유추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런 건축 부재 연구로 이어진 것은 저자가 그만큼 유물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건축 부재중에서도 전돌은 벽과 바닥을 다지는 데 활용되었던 유용한 건축 부재였다. 도판을 보면, 전돌에 드러나는 무늬와 표현 형태에서 이미 미학적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당시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정도로 그 수준이 놀랍다는 사실을 직관할 수 있다.
기와의 마구리라고 표현할 수 있는 와당과 장식 기와라고 할 수 있는 치미는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건축 부재로서 아직도 그 미적가치를 재단할 수 없을 만큼 우아한 유물로서 자리하고 있다. 특히 얼굴무늬와당은 누구라도 한 번쯤 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문화유산으로 각인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유물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이어왔던 연구자들의 노력이 크다.
한자의 도입은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대부분 중국 한족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자의 특징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보면, 막연히 기존 학문 기조를 따라갈 필요 없이 행태 발생적인 측면애서 고찰해 볼 여지도 있다. 이런 기존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은 당장은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진실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이견에도 동의할 수 있는 개인적인 역량이 필요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낙랑의 금석문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말한다. 낙랑의 이러한 금석문이 삼국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는 마치 한사군을 설치했던 당시 한족의 문화를 삼국이 그대로 답습했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아직도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과거사를 토대로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섣부른 측면이 없지 않다. 갑골문자 발견되었던 당시 그 지역을 관할했던 고위 관리가 동이족의 후예라는 설도 있는 것을 보면, 한자가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문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설에서 묘한 설득력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장에서 고구려의 서예와 금석문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을 드러내어 고구려만의 독특한 서풍을 보여준다고 평가한 것은 덕흥리 무덤에 있던 서체유물에서 기인한다. 비록 여기서도 중국의 서풍을 닮았다고 기술하지만 저자가 평가했던 그 이상으로 고구려 고유의 서체미가 드러난다고 하면, 이는 한자 근원의 종주국이 바뀌는 선례로서 오히려 이 서체를 토대로 중국의 서체를 비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아직은 강단 사학의 주장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등으로 이런 시각이 조명될 리 만무하겠지만 그만큼 우리의 역사적 진실과 실체를 파헤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중국 사대주의 문화와 과거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잔재, 근래에 중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동북공정 등으로 인한 동이족의 유물과 유산에 대해 평가절하 등의 원인이 맞물린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추정일 듯하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은 역사적으로도 일제의 왜곡적인 행태가 드러난 대표적인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역사조차도 왜곡하는 마당에 과연 우리가 그들이 식민사관을 토대로 기술한 역사책을 아직도 그 원전으로 삼아 역사교육의 토대로 삼는 작금의 현실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역사적인 유물에 대한 접근 속에서 우리의 역사적 진실이 어떤 식으로 왜곡되고 있는지 평가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과거의 사료를 연구하는 의미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일제가 탁본의 비문을 왜곡하여 식민사관을 만드는 자료로 삼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악의적인 비문의 훼손과 수정을 통해 원 비석의 사료를 교정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이 없다. 이는 아직 객관적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측면에서 현실적 제약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겠지만 고대의 사료를 객관적인 측면에서 검증된 사실 위주로만 평가하려는 저자의 집필 의도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평양석 각석에서 보이는 저자의 진술은 고구려의 활달한 기상의 담긴 서체를 인정하면서도 아직은 중국에 못 미치는 서체일 수밖에 없음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백제의 금석문에 나타난 필자의 견해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중국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백제인은 글씨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뒤로 이어지는 글에서는 백제의 사신이 당시 명필인 소자운의 글씨를 얻기 위해 30여 번이나 절하고, 배를 3일 동안 멈추게 하면서 엄청난 금화를 지불하고 글씨 30여 자를 받아 갔다는 일화를 전한다. 이 일화는 누가 보더라도 굴욕적인 백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상식적으로 과연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유추해 본다면, 과연 이런 기록들이 누구의 관점에서 기술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사택지적당탑비의 발견 유래를 들어보면 여전히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일제가 신사를 지으면서 여러 고을에서 옛 주춧돌이나 지대석을 차출해서 모아두었는데 그 돌더미 속에서 이 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문화유산의 실태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과연 우리 역사를 진실되게 보전하여 우리가 후대의 자손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할 수 있도록 그런 토대를 보존해 주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신라의 금석문에 나타난 특징을 저자는 실질적인 생활문으로 그 가치를 평가한다. 그 이유로 이 장에서 소개한 비들이 대개 자연석이나 바위 등에 새긴 것으로 비면을 연마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신라의 산성 축조비로 <남산신성비>와 <단양적성비>를 소개하는 장이다. 이 장에서는 <남산신성비>의 유래가 담긴 기록을 소개하고, <단양적성비> 발견 당시의 상태, 비문에 기록된 글자 수, 고구려와 백제의 비에서 볼 수 없는 질박하고 경쾌한 맛을 풍기는 비의 특성을 기술한다.
진흥왕순수비와 재발견 과정을 보면, 비록 우리의 유물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짐작할 여지를 준다. 척경비는 영토를 넓힌 일을 기념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이에 비해 순수비는 왕이 직접 순행한 지역을 기념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저자는 애초의 척경비와는 대비적으로 순수비에서 금석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기술한다.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를 말한다. 이런 순수비의 재발견은 후일에서야 가능해졌다. <북한산비>는 추사 김정희, <황초령비>는 한백겸, <마운령비>는 육당 최남선의 재발견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역사와 유물을 찾기 위한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