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미에 보내는 경의
불구와 사리장엄구는 낯선 용어다. 저자가 설명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 공예품에는 예불 의식에 필요한 제반 도구인 불구(佛具)와 사리를 장치하기 위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있다.
불구는 불단을 장식하는 꽃병, 촛대, 등, 향로 등 사찰의 일상용품을 총망라한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탑 안에 봉안하기 위한 장치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고분미술에서 금관을 만들던 기술이 불교미술에 와서 사리장엄구로 구현되었다고 한다. 이는 당대 최고의 기술이 불교문화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불교가 단순한 종교의 범주를 벗어나 국가적인 차원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신적인 본향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첫 장을 넘기면 도판으로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 일괄’이라는 사진이 보인다. 사리장엄구로 보이는 공예품은 저자가 언급한 대로, 당대 공예 기술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미적 감각을 드러낸다. 사진을 보면,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현대적인 디자인과 감각에 비견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예술적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저자가 피력한 대로,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백제 미술사와 고고학의 최대 성과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향로의 크기는 64센티미터, 무게는 11.8 킬로그램으로 당대 향로에 비하면 두 배에 가까운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향로를 구성하는 요소를 보면, 믿기지 않을 만큼 수많은 장식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26마리의 동물을 비롯하여 25개의 산들이 네다섯 겹으로 표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산길, 계곡, 폭포와 같은 자연적 상관물을 비롯하여 16인의 인물상, 상상 속의 짐승과 현실 세계의 동물 등 약 100가지 도상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니 그 가치의 우수성을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조차 무리한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런 우수성이 발현된 백제 고유의 향로가 중국의 박산향로의 형식을 따른 것이라고 단언한다. 도판에서 제시된 박산향로를 얼핏 보면 비슷한 점도 없지는 않지만 이는 향로라는 도구적 특성에 기인한 것일 뿐, 누가 보더라도 주객이 전도된 상황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박산향로가 향로 제작에 참고가 되었을지언정 그 형식을 따른 것이라고 하기엔 그 수준의 차이가 너무 커서 오히려 역으로 그 과정을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는 중국 향로의 형식을 따른 것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아예 새로운 차원에서 백제 고유의 향로를 재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유물은 정확하게 그 생산 연도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이유가 가장 클 터이지만 유물이 훼손되고, 정확한 기록을 찾기가 어려운 이유도 한몫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불교의 사리장엄구는 이런 고대 유물의 불가측성을 해소할 수 있는 유물로서 우리의 유물사에서 다소 독특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2007년 부여 왕흥사터에서 명문과 함께 발견된 사리함은 그 연원을 구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 주었다는 측면에서 유물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진 도판에 소개된 신라시대 황룡사터 출토 진단구 유물 목록을 보면, 당대의 유물이 어떤 수준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부각할 수 있는 사료가 될 수 있는지 명징하게 드러난다.
백제 창왕명석조사리감의 발견은 당대의 유물이었던 사리함을 발견하지 못했던 상황에서도 부속물을 통해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역사적인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부여 왕흥사 사리함은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견된 지 12년이 지난 후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사리함의 발견에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사리함의 미적 가치와 유물로서의 의미보다는, 사리함의 가장 바깥 외함인 동사리함 몸체에서 발견된 명문이 우리가 그토록 추앙했던 《삼국사기》의 기록과 불일치를 이룬다는 점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우리 민족의 대표 역사서라고 보기엔 그 가치가 크지 않다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른 추론을 뒷받침한다. 역사서가 후일에 잘못 기술되거나 전달될 수 있는 특성을 감안한다면 당대 발견된 유물에서 나온 명문이 조작될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다.
익산 미륵사 서탑 사리함의 사진 도판을 보면, 사리함이 화려함과 예술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난 예술 작품이 될 수도 있음을 직관케 한다. 이외에도 왕궁리 오 층 석탑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사리병과 사리상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이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의 문화로 이어질 수 있는 예술적 자산임을 실감케 한다.
1971년 무령왕릉의 발굴부터 시작된 백제 유물 발견의 역사는 <백제 금동대향로>, <왕흥사 사리함>, <미륵사 서탑 사리함> 등의 발굴로 이어져 백제 공예 예술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런 유물 발굴사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불가분의 진리라는 고착화된 믿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증사학이 역사를 연구하는 한 분야임을 인정한다손치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고, 기존에 집대성된 역사 사료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유물 발굴을 통해 그 기록이 수정될 여지가 있다는 유연성을 잃지 않는다면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가치를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아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존의 학설과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삼국시대 사리함과 향로에 대한 유물을 살펴보면서 이런 비판의식을 견지한다면 우리 힘으로 발굴된 유물조차 평가절하하는 일들은 차츰 사라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