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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불상조각

한국 불상조각의 원류

by 정작가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삼국시대의 불상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전 저자는 인도와 중국 불상의 양식점 흐름에 대해 살핀다. 아무래도 불교의 시발점인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삼국으로 전파된 흐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 · 중국 불상의 양식적 흐름에서는 불상에 대한 개괄적 사항을 다룬다.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 유래에서부터 불교의 전파 과정 또한 간략하지만 소개하고 있다. 오래 전의 유물을 다루다 보니 전체적으로 내용은 개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다소 파편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당시의 사료적 한계와 부족한 유물을 통해 불상이라는 거대 담론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 불상의 출발을 상현좌 여래좌상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 비춰볼 때 그만큼 불상과 관련된 유물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설사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도 외국에서 전래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고, 여러 연구 과정을 거쳐 이를 증명해야 하는 과정 또한 결코 녹록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를 유추해야 하는 것도 고대 불상을 연구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 과정 속에서 고구려의 불상이 전래받은 지 100년이 지나고서야 불상다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고구려에서 불교 전파가 느리게 진행되었음을 밝힌 것도 큰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가치는 삼국시대 불상 중에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의 불상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커다란 행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대 유물사에서 이렇듯 추정 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유물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1광3존불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과 비슷한 형태의 유물이지만 하나의 광배에 여래상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보살상을 작게 배치한 점이 다르다. 저자 또한 양식적 친연성을 보인다고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원오리 출토 소조불을 석회 틀에 진흙을 찍어 만든 토불로 규정하고 있다. 이어 현재 알려진 고구려 불상의 수가 삼국 중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를 밝힌다. 그 이유는 고구려에서 불교가 국가적인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전승된 형태로 자리 잡았던 시대적 맥락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백제의 초기 불상은 부여 신리에서 발견된 <신라 출토 금동여래좌상>을 꼽는다. 도판에 소개된 불상의 형태를 보면 조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어 출토된 <납석 여래좌상>만 봐도 그 수준이 대폭 개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 불상의 자세, 표정, 조각 기법 모두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인의 정서를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기술한다. 불상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백제, 청양 본의리에서 발견된 좌대는 유물의 수준이 <납석 여래좌상>을 뛰어넘는다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표현 양식과 기법, 크기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1광3존불이란 형식의 유물은 백제에서도 유행했다. 크기와 형식적인 면에서는 고구려 양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고구려 유물에서 볼 수 없었던 세밀함이 돋보인다. 백제의 1광3존불 중에는 본존불만 남아 있거나 협시보살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도 여러 점 전하지만 온전한 유물을 찾을 수 없어 그 가치를 논하기는 어렵다. 고대 유물은 이렇듯 온전하지 못한 사료와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이전 유물의 가치를 해석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과 여러 기록을 토대로 유추하는 것 이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 강의>가 대단한 점은 그런 부족한 유물을 토대로 방대한 사료 발굴과 연구를 토대로 조금이나마 유물 해석의 가능성을 진전시키고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백제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이란 장에서는 도판으로 네 점의 유물들을 소개한다. 이들 유물들을 보면 크기는 그리 크지 않고, 미학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금동관음보살입상차원에서 보면, 각기 독창적이고 고유한 표현 양식을 통해 불상의 수준을 단계별로 높여가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다른 유물 한 점은 <백제관음상>이다. 이 목조관음상은 금동관음보살입상처럼 10~20cm 남짓한 유물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미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이 유물은 저자가 언급했던 것처럼, ‘<규암 출토 금동관음보살상>이나 <선산 출토 금동관음보살상>을 등신대로 확대한 듯한 양식적 친연성’을 보인다는 표현을 그대로 수긍해도 좋을 만큼 직관적으로도 미학적인 가치를 담보하는 유물이다. 2.2미터에 달하는 이 목조관음상은 일본에 전래된 유물을 전파한 백제에서도 미처 찾아볼 수 없는 대작이고, 우수한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제의 마애불은 건축에서 석탑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출한 것만큼이나 백제인의 창의적인 조형능력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서산 마애삼존불>,<예산 사면석불>,<정읍 석조이불입상>,<익산 연동리 석불좌상>,<익산 태봉사 석불 삼존상> 등이 그런 유물들이다.


백제의 소조불은 금동불, 석불, 마애불과 더불어 진흙으로 빚어낸 부처상을 가리킨다. 부서산성이나 정림사터 등에서 발견된 소조불은 대량 생산을 위한 양식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불상에서 나타난 형태는 비상이다. 이는 ‘비석 모양에 불상을 새기고 발원문을 새겨 넣는 것’을 말한다. 이를 미술사에서 ‘연기파 불상’이라고 하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난 백제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유물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신라의 불교에서 찾을 수 있는 불상 유물은 탄생불을 들 수 있다.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는 요즘에도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는 욕불제가 행해지는데 금동탄생불을 보면, 그 기원이 아주 오래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현세적 이미지의 불상들은 신라 불상의 양식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다소 이상화된 부처의 얼굴을 나타낸 것이 아닌 세속적인 인간의 모습을 본뜬 점에서 그 특이성을 갖는다.


약사여래상은 치유와 건강을 기원하는 부처상을 말하는데 도판에 수록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을 보면, 다소 신체 비율이 맞지 않은 사진 속의 유물을 볼 수 있다. 이는 신라 조각의 서툰 솜씨로 폄하되기도 한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경주 남산의 석불상은 배리 석조삼존불상과 석조미륵삼존상을 비롯하여 감실 불상을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석상들의 발현은 불교적인 이미지를 조각하여 장소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신라에서 미륵 신앙이 화랑과 연관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작은 금동불에서 거대한 석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륵반가사유상이 만들어지는 근원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은 ‘여래상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상 10구가 새겨져 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이는 신라 불교의 현세적이고 실질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서 자리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양산, 안동 등에서 출토된 신라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유물에 관한 식견이 없는 사람도 문득 반가사유상의 자태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마치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대중들에게 알려진 고유의 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중에서 대표적인 두 가지 유물로는 <탑형보관 금동반가사유상>과 <삼산관 금동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국보 78호, 국보 83호로 지정될 만큼 유물의 가치와 유산의 측면에서도 인정을 받은 작품이다.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가 이 유물과 관련된 느낌을 피력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지금 이 미륵상에서는 인간 실존의 최고의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 외에도 이 장에서는 일본 아스카시대 불교미술에 끼친 삼국의 영향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법륭사의 <백제관음상>이 그토록 미학적 가치로 인정받게 된 것은 당연히 삼국이 끼친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일본 불상 미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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