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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가람배치와 석탑

석탑의 나라로 가는 길

by 정작가


삼국시대 가람배치와 석탑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고대국가에서 불교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전의 종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분야였기 때문에 저자가 불교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불교와 고대국가라는 장에서 언급한 내용은 고대 삼국의 미술 양식이 고분 미술에서 불교 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을 비롯하여, 고대국가들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불교에 대한 개괄적 기술이라기보다는 다소 파편화된 정보를 다룬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삼국의 불교 전래 과정 또한 역사적인 기록을 토대로 그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불교 미술을 다루기 위한 전초적 성격을 띤다.


가람배치란 고구려·백제·신라가 불교를 수용한 뒤 각각의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맞춰 사찰(가람)의 건물들을 어떤 구조와 질서로 배치했는지를 의미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를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가람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다음 부속 건물들을 정연한 비례에 의해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삼국시대 가람배치는 기본적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 등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였다.


이런 가람배치의 기본 틀이 삼국은 거의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 다르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고구려 사찰의 특징으로는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3개의 금당이 배치되는 이른바 1탑 3금당이 많았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고구려식 배치법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힌다. 이런 유추와 추측에 근거한 비교 방식은 당시 유물과 사료에 대한 부족함에서 기인한다. 워낙 오래 전의 사찰 양식을 남은 유물을 토대로 정확히 분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런 표현 방식은 작은 단서조차 허투루 넘기지 않으려는 집요한 의지에서 기인한다. 이런 기록들을 토대로 훗날 새로운 발견이 이어진다면 해석의 범위는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사찰은 그래도 비교적 많은 유적들이 있어 한결같이 가람배치가 1탑 1금당식의 배치를 보인다는 결론을 돌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석탑의 연구 또한 다양한 석탑 유물이 존재한다면 거시적인 의미에서 연대기별 특징을 서술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남은 유물을 토대로 이를 연구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백제 사찰 가운데 익산 미륵사와 석탑, 정림사 오층 석탑, 왕궁리 오층 석탑에 한정 지어 이를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익산 미륵사는 면적의 관점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룡사의 두 배 크기이며 사실상 우리나라의 최대의 사찰로 인정받고 있다. 탑, 금당, 회랑이 세 곳에 세워진 3원 가람임이 확인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드넓은 미륵사터에 일부분이 파손된 미륵사 석탑 만이 자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직접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휑한 벌판에 웅장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 석탑의 모습을 보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텍스트에 있는 두 장의 사진은 실제로 미륵사터와 모양을 대비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개략적으로만 봐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미륵사 석탑>에서 출발한 백제의 석탑은 <정림사 오층석탑>에 이르러 비로소 석탑 양식의 틀을 갖추었다고 한다. 다음은 저자가 <정립사 오층석탑>을 표현한 대목이다.

늘씬하게 뻗어 올라간 상승감과 적당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추녀 끝 곡선은 백제의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정림사 오층석탑>을 충실히 재연한 유물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이 탑을 백제탑으로 보는 학자의 견해를 제시한 부분을 보면, 그런 견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확정적으로 이를 진단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사찰에 대한 언급은 분량이 짧다. 그 내용조차도 남아있는 문헌을 인용한 것과 현재는 주춧돌조차 남아있지 않는 대부분 유물의 실상을 감안한다면 부분적으로 훼손되기는 했지만 분황사 모전석탑이 남아있다는 것조차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라의 사찰 중에서도 <황룡사>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황룡사 구층목탑> 또한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여러 사료를 통해 그 규모와 개략적인 형태를 추측해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행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삼국유사》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그만큼 민족사적인 입장에서 <황룡사 구층목탑>이 담고 있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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