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왕국이 남긴 유산
가야의 역사는 미스터리다.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실재했음에도 신라의 역사에 가려 그 가치를 검증하기 어렵고, 실질적인 유물 발굴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해서는 미약하다. 저자 또한 이점을 명시하고 있다.
가야는 스스로 역사를 기록한 것이 없고, 《삼국사기》에도 가야의 역사는 기술되지 않았다.
가야의 역사적 기록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후에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게 만드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흔히들 알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은 가야의 이런 정체성이 규명되지 않았던 틈을 일본사가들이 파고들었던 이유 때문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사실 왜곡과 궤를 같이한다. 일제의 36년간 식민 지배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의도적 조작 여부를 가름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모든 역사를 실증사학으로만 단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유물 해석 또한 오류가 있을 수 있고, 통시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유물을 토대로 과거의 역사를 분석하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역사 추적 작업인 만큼 이 또한 필요한 과정임은 분명하다.
가야 600년 역사가 남긴 것은 오늘날 고분 밖에 볼 수 없다.
이는 객관적인 역사적인 접근 차원에서 볼 때, 가야사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무덤과 무덤 속 유물이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고 할지라도 일상적인 유물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실체적인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적인 가야사의 위치를 감안할 때 현존하는 고분군을 토대로 이를 유추할 수밖에 없는 한계는 인정해야 하리라고 본다.
가야의 고분이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활용되었던 것은 미완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운명치고는 가혹한 역사적 궤적을 그리고 있다.
가야의 고분은 가야의 역사만큼이나 쓰라린 상처를 받았다. 식민사관을 만들기에 열을 올리던 일제가 처음 관심을 가진 고분은 신라보다 가야에 있었다. 임나일본부설을 강화하기 위한 가야 고분의 발굴은 학술조사가 아니라 도굴이었다.
이렇듯 실체적인 역사 유물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악용하는 한, 실체적 유물이 역사적인 등가성을 확보하기는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강단 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옹호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맥락과 궤를 같이한다.
가야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철갑옷과 투구, 금관, 금동관, 둥근고리긴칼, 금귀걸이, 금동신발, 미늘쇠 등 다양하다. 직관적으로도 도판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신라의 금관 양식과 상이함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유물이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익숙한 형태라면 가야의 유물은 그 양식적인 측면에서 독특한 개성미를 발산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미늘쇠는 아주 독특한 유물로 ‘지배층의 상징적 지물’로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 미늘쇠는 넓적한 쇠판 양쪽에 미늘을 붙인 것을 말한다. 저자는 신라의 유물에 비해 가야의 유물을 왕국의 유물다운 정교함이나 화려함은 보이지 않는다고 기술하면서, 이를 ‘미완의 유물이 갖는 한계’라고 규정한다.
가야 고분군에서 발견된 대외교류 유물에는 청동거울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칠기류와 동전 등도 많이 발견되는 양태를 보면, 일상적인 물건들이 주로 교역 물품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청동세발솥>과 같은 한나라 청동기가 한반도 이남 지역이었던 가야 고분군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견해엔 따르면, 낙랑 지역에서 같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교류를 통해 가야로 흘러들어온 것이라 유추하고 있다. 가야 고분에서 왜의 유물이 간혹 출토되지만, 일본에서 가야유물이 훨씬 많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이는 문화 전래의 발상지가 가야국이고, 당시 왜는 문화를 수용하는 차원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인 유물의 교류 흔적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방편으로 가야의 역사를 정조준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