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유산을 찾아서
발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한 제국이었음에도 우리 역사에서는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나라다. 저자 또한 발해문화의 정체성이라는 장에서 상당 부분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역사 속에서도 그 위치를 규정하기 쉽지 않은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때 대제국을 이룩한 나라였음에도 저자가 밝혀낸 유물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역사에 비한다면 이런 결과는 사실상 발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다.
발해의 도성 또한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한때 발해의 수도였던 지역에 성터가 발견되긴 하지만 그런 온전치 않은 유물로는 당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저자가 연구하여 소개한 것에 따르면, 발해의 무덤은 흙무덤, 돌방흙무덤, 벽돌무덤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기술한 것에서 개략적으로 그 축조 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발해의 고분군은 최근까지 166기까지 확인될 만큼 비교적 많은 수를 자랑하지만, 그에 걸맞은 유물 출토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이미 소수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치환하는 작업을 하는 마당에 고분 출토에서 얻을 실익이 크게 없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간단히 고분군의 숫자만 언급해 놓은 것을 보면, 한국 고대사 연구가 그리 쉽지 않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육정산고분군의 정혜공주무덤에서 발견된 고분과 묘지 등을 통해 발해의 높은 문예 수준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라고 할만하다.
발해 석등이라고 불리는 흥륭사 석등은 전하는 유물이 유일하여 그 가치를 조망하기가 쉽지 않다. 저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 석등은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조형적인 의미를 톺아본다면 그 정체성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 유물이 발견된 지역이 발해의 강토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대의 석등이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발해의 불상 또한 유물로서 제대로 전하는 것은 없다. 도판에 언급된 발해 불상의 유물 사진을 보더라도 온전한 형태의 유물은 전하지 않는다. 그나마 제법 형태를 갖춘 유물도 일본 도쿄대학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을 만큼 발해 유물의 전래와 보전 차원에서도 발해 유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발해의 도기 중에서 구름모양도기 쟁반과 삼채향로는 고대의 유물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울 만큼 그 수준과 정교한 조각 기법에서 발해인의 우수한 예술적 재능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일본 도쿄대학박물관 소장이라고 기록된 꽃무늬전돌과 와당을 보면, 자연을 본뜬 기하학적인 무늬 속에서 범접할 수 없는 발해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실감할 수 있다.
비록 20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존속했던 발해 제국은 역사적인 흔적도 없이 증발하듯 사라졌고, 사료에도 그 기록이 충분하게 남아있지 않을 만큼 아직도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미지의 제국으로 남아있다. 이런 발해의 생성과 소멸이 우리 역사에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이렇게 남아있는 유물을 통해서 잠시나마 그 가치를 되뇌어 볼 수 있었던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발해 유물은 그 자체가 희소해서 연구적 성과를 가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노력으로 몇 안 되는 유물이나마 이렇게 직접 눈으로라도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