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안식을 위한 장엄한 그림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고구려 강역의 대부분이 중국에 위치하고 있고, 오래 전의 역사를 기록한 사료 또한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물과 유적을 통해 이를 유추하는 것이 그나마 합리적인 방법적 접근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고분을 통해 고구려 역사를 추적한다. 고구려 역사의 근원이 부여족의 한 갈래에서 시작되었고,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서 건국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 무덤 형식은 돌무지무덤, 일명 적성총(積石塚)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부분은 고구려 무덤에 대한 규모를 기술한 대목이다.
현재까지 집안의 통구 계곡과 우산 기슭에 남아 있는 고구려 무덤은 무려 1만 3000기에 달한다. 환도산성에 올라 들판에 무리 지어 있는 돌무지무덤들을 내려다보면 장대한 대지 미술을 보는 듯 감동이 있다.
제시된 도판 사진을 보면, 무덤 1기의 규모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천추만세무덤은 높이가 15미터이고 둘레가 80미터가 된다고 하니, 모든 무덤이 이렇지는 않더라도 대략적으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무덤이 1만 3000기라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강역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집안 지역에 있는 돌무지무덤 중에는 계단식으로 쌓은 것도 있는 그중 가장 큰 무덤이 장군총이라고 한다.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이 돌무지무덤의 규모는 사방 33미터, 높이가 13미터로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이런 규모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구려 시대의 영토 확장은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64개의 성을 함몰시키고 요동을 차지하고 숙신을 몰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시대에 축조된 무덤 중에는 광개토대왕 시절의 덕흥리벽화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축조 연대와 피장자의 이름과 신분을 명확히 알려주는 유일한 고구려 벽화무덤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변천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초기의 생성기, 중기의 발전기, 후기의 난숙기의 형태는 보이지만 쇠퇴기의 말기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그런 현상 자체가 없었다기보다는 아직 그런 현상을 증명할 만한 고분이나 유물을 발굴하지 못했다는 것이 적확한 해석일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동이족의 역사와 유물을 부정하는 측면에서 자행되었던 역사적 왜곡의 일환이라고 한다면 이런 관점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변천 과정을 고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접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고구려의 금속 공예와 관련된 유물이 흔치 않은 것은 고구려 무덤이 평지에 돌방을 짓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던 공법으로 인해 일찍부터 도굴에 취약했던 이유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그런 측면에서 <금동해무늬맞뚫림장식>의 출토는 의미 있는 발견이었다. 한때는 이를 두고 금동관장식으로 판명했지만 후에 금동판장식으로 정정되었다고 한다. 금동관장식의 출토 사례로는 <금동불꽃무늬맞뚤린관장식>을 들 수 있다. 이를 고구려 금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불상의 금동관 장식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 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고구려 관모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장식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금동판 장식에서 나타나는 문양은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 용과 봉황이 어우러진 전체적인 구성인 불꽃무늬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 특징적이라 할만하다. 금귀걸이와 청동 그릇의 발견 또한 고구려의 금속 공예 양식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유물로서 자리하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 벽화무덤의 수는 180여 기에 달한다. 이 중 귀족의 무덤이 대종을 이룬다는 것이 핵심이다. 개략적으로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의 그림 양식을 구분해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 초상화, 생활 풍속화, 장식 무늬와 사신도가 그런 양식이다.
안악 3호 무덤이 역사상 중요한 무덤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여태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 벽화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벽화의 내용도 다양하고 벽화의 조성 연대와 피장자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워낙 오래된 벽화이다 보니 피장자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의 출발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는 점으로 볼 때, 고구려 고분 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한다고 볼 수 있겠다.
덕흥리무덤, 일명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는 예술성은 뒤떨어지지만 고구려 고분벽화 중 유일하게 주인공과 축조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기준작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공적인 사무와 사적인 생활상이 적절하게 분절되어 있고, 도상마다 한자로 기록한 내용이 있어 고구려 풍속사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유물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덕흥리 무덤 근처에 위치한 수산리무덤, 두기둥 무덤은 행렬도 벽화무덤으로 칭하는데 주인공의 행렬도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생활풍속도 벽화무덤으로 씨름무덤, 춤무덤은 학교 역사 시간에 교과서에 한 번쯤 접해 보았을 벽화를 담고 있는 무덤이라 나름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씨름하는 장면과 여러 사람이 같은 문양의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비롯하여 말을 타며 사냥하는 모습이 담긴 벽화는 전혀 낯설지 않은 장면으로 다가온다. 특히 사냥하는 장면이 담긴 벽화는 미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학적인 가치를 담보한다.
장식 무늬의 벽화가 등장한 것은 동명왕릉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흐름이 생활풍속도에서 후기 사신도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면 장식 무늬 벽화는 다소 낯선 그림 양식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 시기 불교 전래 등으로 불교 도상이 등장했던 시점이라고 한다면 벽화 속 연꽃무늬의 등장이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장식 무늬 벽화 무덤으로 분류되는 무덤으로 산연화무덤, 덕화리무덤, 겹둥근무늬무덤 등이 있다.
사신도 벽화는 중국의 음양오행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는 사방신의 성격을 띤 사신도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방위신으로 상징체계를 이어간다. 퉁구사신무덤, 호남리사신무덤, 강서큰무덤에서 발견되는 사신도는 이런 궤적에서 나타난 작품들이다. 진파리무덤과 집안다섯무덤은 이런 사신도를 주제로 하면서도 상상적으로 발현된 신선들을 그려 넣어 그 신비감을 더했다. 농사 신, 불의 신, 수레바퀴 신, 용을 탄 신선, 장구 치는 신선, 춤추는 신선 등 생활에 밀접한 신선들의 등장은 당시 생활상을 투영한다는 측면에서 귀중한 사료로서 그 위치를 점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백제, 신라, 가야, 왜로 퍼져나갔다. 백제의 무덤에서는 사신도가 나왔고, 신라에서 발견된 무덤에서는 연꽃무늬 장식이 보이기도 한다. 가야 지역이었던 경북 고령 지역 무덤에서도 연꽃을 비롯한 꽃과 풀 무늬가 있는 벽화가 발견되었다. 일본의 나라현 아스카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 연관된 양식들의 흔적이 엿보인다.
고구려 고분 미술은 당시 생활상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료로서 그 의미가 크다. 아직 우리의 고대사가 명확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단정적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벽화에 남겨진 그림을 단서로 역사를 추적해 가는 과정은 역사를 바로 찾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 등으로 올바른 역사 찾기가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웅혼한 기상을 펼쳤던 고구려 시대의 고분을 추적하고 관찰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남겨주었다. 안타까운 점은 우리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세상에 공표할만한 토대가 아직도 마련되지 않은 채 중국의 역사관에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동북공정을 막기 위해 설립된 역사재단조차도 오히려 그에 반하는 역사적 궤적을 걷고 있는 현실은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아직도 초보 단계라는 것을 직시하게 만든다.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 강의>를 통해 단편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