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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또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샤먼의 제의적 전통

by 정작가


덴마크의 고고학자인 크리스티안 톰 센은 인류의 역사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나누었다고 한다. 고조선은 여기서 청동기시대에 해당한다. 청동이란 구리에 주석을 넣은 합금을 말하며 이런 청동기는 오리엔트인이 기원전 5000년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그 기원으로 보고 있다. 중요한 점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의 청동기문화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출발하였고, 알타이, 스키타이, 오르도스, 몽골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친연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유물의 표식은 빗살무늬토기가 사라지고 민무늬토기가 자리 잡기 시작했고, 청동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고인돌이라는 새로운 장묘 문화가 생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청동기 문화는 이후 1천 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중국으로부터 철기문화가 들어오면서 전기청동기시대, 후기청동기시대 또는 철기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며 고조선의 고토에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의 설치되었던 점을 인정한 점이다. 특히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의 고립된 문화에서 서서히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한 국가로 편입되어 갔다’는 대목을 살펴보면,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청동기 문화 시대의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했던 고조선의 강역이 중국의 문화권 내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점이다. 한사군 설치 또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큰 역사적 사건임을 감안할 때 이런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다만 문화적인 차원에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삼국유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만큼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도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사학계에서도 고조선을 신화로 보고 있는 부류가 있는 반면 역사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도 언급했던 것처럼 각 나라에는 민족마다의 신화가 있기 마련이다. 아직도 주류사학계에서는 여전히 고조선을 신화의 영역으로 보고 있지만 당대의 역사적인 사료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다고 한쪽의 편중된 시각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우리가 배웠던 역사가 진리에 기반을 두지 않고, 국제적으로나 정치적인 부침에 의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균형된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고대상고사에 접근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고조선의 강역 또한 새로운 관점에서 시선을 확장할 필요는 있다고 하겠다. 그나마 고조선 유물에서 발견되는 상징과도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하니 이를 토대로 역사적인 궤적을 훑어간다면 새로운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세 가지 공통점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토기는 복주머니처럼 생긴 미송리형단지이고, 청동기는 비파형 동검이며, 묘제는 고인돌 중에서도 북방식 고인돌이다.


저자에 따르면 청동검은 ‘무기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제관이나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기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전기에는 비파형동검, 후기엔 한국식 세형동검으로 유행이 바뀐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비파형동검은 요령 지방에서 많이 발굴되어 요령식동검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고조선의 강역에서만 비파형동검이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황해도 신천, 부여의 송국리까지 출토지가 확장되었다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고조선의 영향이 실로 광대함을 느낄 수 있다. 비파형동검이 초기철기시대로 오면서 날렵한 형태의 세형동검으로 바뀌면서 미학적인 견지에서 우수한 작품이 많이 탄생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대구 비산동에서 출토된 동검 중에서 손잡이 부분은 아주 세련된 디자인이어서 더욱 각광을 받기도 했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청동 무기는 물론 농기구 또한 흔히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살펴보면, 청동기 문화에서 의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유추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출토된 유물을 보면 하나같이 의기가 대부분이다. 무기류는 청동도끼, 청동창, 청동꺾창, 청동화살촉 정도이며 청동거울, 청동방울, 장대투겁, 대쪽모양동기, 방패모양동기, 나팔모양동기, 농경무늬동기, 견갑모양동기 등각종 의기류가 주를 이룬다.


청동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무렵부터는 빗살무늬토기가 사라지고, 민무늬토기가 주축이 된다. 민무늬 토기에는 출토 지역에 따라서 압록강 유역의 미송리형토기, 대동강 유역의 팽이모양토기, 두만강 유역의 구멍무늬토기, 금강 유역의 송국리형토기 등으로 나뉜다. 이들 토기들은 당시 각 지역의 생활 문화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데 이 중에는 조형적으로 세련미도 있지만 질그릇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로서도 그 의미는 크다고 할 것이다.


부여와 논산의 경계를 이루는 송국리유적이 주목받은 이유는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역사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토기와 반달칼, 돌칼, 돌화살촉, 대롱옥, 공옥 등이 출토되었고, 불에 탄 쌀도 발견되어 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뿐만 아니라 남한지역에서 유일하게 비파형동검이 발굴현장에서 정확히 수습된 것이 처음이라는 의미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의 특징으로는 이런 동검의 발견 외에도 누구라도 언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물이 있다. 바로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비정상적인 느낌이 들만큼 한반도 이남 지역에 집중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을 지닌 유물이다.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전 지배층의 무덤을 거대한 돌로 장식하는 거석기념물 문화는 한반도를 비롯하여 지중해와 인도,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두루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이 중에서도 고인돌이 유독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점이다.


고인돌의 형식은 굄돌을 탁자 모양으로 높게 설치한 북방식과 낮은 발받침을 한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 굄돌 없이 덮개돌만 있는 덮개돌식으로 구분된다.


북방식 고인돌은 장중한 멋이 있는데 반해 남방식 고인돌은 조형적 형태미는 거의 없는 반면 수십, 수백 기씩 무리 진 형태로 나타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인돌이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유물이라고 한다면 암각화는 제한된 지역에서 한정된 상황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울주반구대암각화>는 자연조건에 쉽게 영향을 받아 유물을 관람하는 것조차 제약이 따른다.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암각화가 발견된 곳은 주로 경상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유명한 <울주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하여 <천전리 암각화>, <고령 양전동 암각화> 등이 그것이다. 이들 암각화들은 대부분 기하학적 추상 도안으로 구성되었고, 똑같은 도안의 암각화가 발견되어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암각화가 자연에 새겨진 기록을 토대로 유물을 유추하는 과정이라면 대외적인 교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유물도 분명 존재한다. 이국의 유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유물의 출토는 당대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유추하고, 문화의 전래 등을 탐색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에는 주변국인 중국, 일본과 교류하며 그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그중 철기로 무장한 연나라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는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이 고조선 지역은 물론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도 출토된 점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일본의 야요이 문화에 영향을 끼친 가야 문화의 전래과정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국의 유물 발견을 통해 대외적인 관계를 유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 다른 논쟁의 지점에 있는 것은 한사군 설치에 관계된 지역에 대한 언급이다. 낙랑을 비롯한 진번, 임둔, 현도 등의 한사군 설치는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건이다. 고구려 강역을 축소하고,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아공정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사건인 만큼 사료의 정확한 해석과 유물 출토와 관련된 면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도 이 부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평양 일대에서 낙랑과 관련된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 사례를 보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한사군 위치가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낙랑의 채협총에서 출토된 체화칠협과 평양 석암리 9호 무덤에서 나온 <금허리띠 장식>은 한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최고급품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낙랑의 고급문화는 한반도의 여러 부족에게 큰 자극을 주어 문자가 도입되고 질그릇 문화에 혁신이 일어나며, 금속공예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구만 본다면 우리 문화가 낙랑의 한사군 지배 시절 영향을 받아 문화가 꽃피웠던 토대가 되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사군 지배는 사료적, 지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안임을 감안할 때, 이를 단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 장에서는 고조선과 청동기 시대의 유물에 관해 다루어 보았다. 워낙 방대한 유물을 다루고 있고, 생경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미술사에 대해서는 기초도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문화학계 거장의 저작을 읽기만 해도 벅찼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이런 기회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유물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한국 미술사의 족적을 더듬어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미술사와 역사가 혼재된 대목에서는 주어진 내용을 무조건 그대로 수용해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게 된 일천한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저자에게 누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한편, 주관적인 관점에서 책을 읽고 분석하는 재미에 빠져든다는 것 또한 신선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의견을 피력하기로 했다.


실증사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유물로서 검증되지 않은 역사는 모두 무시할 수 있다는 견해를 지배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고대 상고사의 역사를 모두 유물에 근거한 방식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분적으로 역사적인 사료로 남아있는 문헌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충분한 근거가 될 만큼 그 문헌의 양이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할 때, 유물로서만 모든 역사를 재단하는 일은 재고되어야 할 소지가 있다. 우리는 어떻든 기존의 학설이 주류라고 교육받은 상황에서 이를 뒤집는 일이 어떤 근거에 기초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주류 학설이 잘못된 기반에 근거한 것이라면 과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한국사를 좌지우지했던 주축 세력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의심해 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일제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는 상황에서 역사 또한 그런 전철을 밟았다고 바라볼 여지는 충분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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