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 / 중앙M&B
<가을꽃 겨울나무>는 한수산 작가가 중앙일보에 연재하여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소설을 개작을 거쳐 단행본으로 펴낸 소설이다. 내용을 보면 요즘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많이 목격되지만, 이는 이 소설이 나온 지 30년이 넘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동경의 대상으로 지목할 수 있는 첫사랑을 담은 이야기다. 부잣집 아들과 가정교사의 사랑이라는 흔한 모티프를 띄고 있으면서도 소설은 감성적인 주제에 안착하지 않고, 리얼리티를 선보임으로써 수준 높은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사랑이야기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의 미학이 있어야 여운이 남는다. 이 소설 또한 그런 공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980년대 후반, 시대적인 배경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당시는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런 시절을 넘어서 민주화가 정착되어 가던 과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또한 문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시대적인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을 쓰고, 홀연히 한국을 떠난 이유도 어쩌면 그런 상황과 연계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볼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서도 시대의 아픔에 대한 메시지는 읽기 어렵다. 그저 통속적인 연애 소설이라는 범주에서 소설을 읽는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이 소설은 여주인공인 신혜가 첫사랑을 경험하게 되면서 사랑에 눈뜨게 되고, 그런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홀로 세파 속에 물들어가는 인생 역정을 그려낸 일종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인공이 시대적인 한계성에 매몰되어 지극히 순응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신데렐라 콤플렉스처럼 자기 의지보다 누군가에 기댄 식으로 그려지는 수동적인 인물의 여성상은 지금의 현실과 비추어 볼 때 괴리감이 크다. 그만큼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얘기다. 그렇더라도 꼭 주인공이 그렇게 허물어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괜한 기우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가 비록 시대적인 한계에서 촉발된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이 개인적인 한계로 전이된 이유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의지가 있었다면 그렇게 힘에 굴복하고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꽃 겨울나무>는 마치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 유려한 필치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작가의 세련된 문장 감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 줄의 문장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감성을 자극한다. 금속성 울림이라는 표현이 아직도 기억을 맴돌 만큼 깊게 각인되는 이유도 정서적인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비록 통속적인 연애 소설이라는 한계로 시대적인 아픔을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 속의 간극을 통해 시대의 정서를 엿볼 수 있던 것은 잠시나마 이전의 시절로 회귀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음 한 구석에 영원히 로망으로 남을 한 편의 소설, <가을꽃 겨울나무>를 통해 잊혀진 지난 시절의 순수함과 애틋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던 것 같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