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쓰 노! 말하지 않는 자 먹지도 못할지어다.
드디어 어린이집 적응 훈련 중인 우리 아이도 오늘부터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오늘의 점심은 파스타, 토마토소스, 치즈가루였다. 한국 어린이집 다섯 구짜리 식판 중 반찬으로서 한 칸 정도 차지할 파스타가 점심 메뉴의 전부라고?
허허 10년 넘게 독일 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문화충격을 연일 받고 있다.
오전 11시, 식사 시간 전에 Singkreis ( Sing : 노래, Kreis : 원형, singing circle)라고 일컬어지는 아이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함께 노래 부르는 시간이 진행된다. 선생님의 지도하에 아이들은 등원부터 오전 내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모두 깨끗하게 치우고 교실 한편에 펼쳐진 카펫 위에 둘러앉는다. 선생님은 노래 가사와 그에 맞는 그림이 그려진 카드가 꽂힌 책을 가지고 와서 함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각 아이들에게 두 가지의 카드를 보여준 후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다.
"알마,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어? 여기 소방차 노래랑 토끼 노래가 있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줄래?"
아이는 꽤나 진지한 얼굴을 한채 둘 중 한 가지를 골라 선생님께 내민다. 그럼 선생님과 아이들은 모두 알마가 뽑은 카드에 적힌 노래를 부른다. 그다음은 릴리의 차례다. 선생님은 릴리에게 꽃과 물고기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며 릴리에게 선택을 하게 하고 릴리가 선택한 물고기 노래를 다 같이 부른다. 이렇게 다섯 아이가 선택한 다섯 곡의 노래를 다 부른 후 아이들은 식탁으로 건너온다.
다섯 아이가 둥근 식탁에 서로를 마주 보며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은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식사 전 의식을 치렀다. 큰 수건을 아이의 목 앞으로 가져와 질끈 묶어 턱받이를 만들어 줬다. ” 자 턱받이 하고 왼손 걷고 오른손 걷고~! “ 그러고 나서 빈 물컵과 포크 수저 빈 그릇을 아이 앞에 놔준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각자의 순서에 맞춰서 턱받이를 하고 식기의 세팅이 끝나면 선생님은 아이들의 빈 물컵에 물을 채워줬다. 작은 에스프레소 투명 유리컵을 일반 물컵으로 쓰는 아이들이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을 따를 때도 그냥 따라주지 않는다.
"니콜라스, 물 마실래? 물 따라줄까?"
"Ja! (네!)"라고 대답을 하면 물을 따라준다.
모두에게 물을 따르고 나면 식탁 한가운데 있는 파스타가 들어 있는 큰 그릇을 들고 다시 한 명 한 명에게 물어본다.
"알버트, 파스타 줄까?"
"네!"
"미란쮸, 파스타 먹을래?"
"네!"
아이들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파스타를 그릇에 덜어준다. 그리고 토마토소스가 들은 그릇을 들고는 다시 물어본다.
"에밀리, 토마토소스 먹을래?"
"Nein! 아니요!"
오늘 아이의 입에서 첫 아니요가 나왔다. 선생님은 오케이 하며 에밀리에게는 소스를 주지 않았다.
"알마, 토마토소스 먹을래?"
"Nein! 아니요!"
이번에도 선생님은 두 번 권하지 않고 소스를 패스했다. Ja (네!)라고 대답한 아이들만 소스를 받는 광경을 목격하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충격이었다. 내가 상상한 모습은 “ 그래도 한 번 먹어볼까?” 하며 또 한 번 권하고 아이를 달래는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아니 어쩌면 정 없이 차가운 모습으로 순서를 넘겨버렸다.
그리고 치즈 가루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Ja라고 대답한 아이들만 치즈가루를 받았고 선생님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급식표의 메뉴는 토마토파스타였지만 아이들 앞에는 그들의 선택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조합의 파스타가 놓여있었다. 어떤 아이는 맨 파스타에 치즈가루만 먹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심지어 치즈가루도 없이 삶아진 파스타만 먹었다. 다섯 명 중 두 명만 토마토파스타와 치즈가루를 제대로 먹었다. 세상에... 저 만 세 살도 안된 (심지어 한살이 갓 된) 어린아이가 Nein(싫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해서 아예 그 음식을 안 준다고?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는 아직 도리도리밖에 못하는데! 모든 질문에 도리도리로 일관했다가 한입도 못 먹고 오면 어떻게 하지? 식탁에 앉아 있는 작디작은 우리 아이를 보며 갑자기 걱정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두 번 권하지 않는 인정머리 없는 독일인 같으니라고! 충격을 한 아름 받고 어질어질한 머리를 진정시키며 물을 한 컵 벌컥 벌컵 들이켰다.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숟가락 포크를 쥐고 흘리는 거 반, 입으로 들어가는 거 반 열심히 먹더니 더 먹고 싶으면 선생님께 더 달라고 표현을 했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그릇을 선반 위에 갖다 놓고 선생님께로 가면 선생님이 턱받이를 빼주고 물이 흥건히 적셔진 수건으로 손과 입을 씻겨주셨다.
어떤 아이는 식기류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테이블에 놓음 채 선생님에게 갔다. 선생님은 "에밀리, 식기 선반에 가져다 놓을래? “라고 물었다. 에밀리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대답을 했다. 나는 이때도 선생님이 다시 한번 가져다 놓으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래 그럼 이리 와서 손 하고 입 씻자"라고 넘어가는 것에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와 점심시간 하나 같이 했을 뿐인데 연타로 다가오는 문화충격에 얼른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독일에 와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나의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늘 "아무거나 괜찮아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것이 최고인 것으로 알고 살아왔었는데 독일에 와서는 꽤나 종종 나의 의견을 얘기해야 할 때가 많이 있었다. 어려운 질문도 아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여러 개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표현해야 할 때마다 나는 참 망설였고 대세의 흐름에 따르기 위해 눈치를 보며 대답하기 일쑤였다. 그런 나에게 이런 어린이집 시스템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제야 독일 사람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이집 시스템은 아이들에게 네 아니 오를 선택하고 대답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아이들이 표현한 그 대답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자기 의견을 그대로 인정받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자연스레 본인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게 되고 상대의 의견 또한 그대로 존중해 주며 자라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가 도리도리를 재미있어해서 모든 것에 도리도리로 대답하기에 의사소통 실패로 밥을 굶고 오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어 “선생님 우리 아이는 그냥 골고루 조금씩 덜어주세요”라고 말할까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우리 아이도 배가 고프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겠지… 아이와 교육 시스템을 믿어보기로 했다. 초반에는 굶고 올 수도, 원하는 걸 못 먹고 와서 속상하고 힘들 수 있지만 그 시기를 지나면 아이도 자기표현을 확실히 하는 시기가 올 것 같다. 아이가 당당하게 의견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하며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길 바라본다.
p.s. 물론 이 방법은 편식을 유도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가리는 것 많고 안 먹는 것 많고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파스타에 소스 없이 치즈가루만 먹는 독일인들도 종종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