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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즈베리 Sep 05. 2024

단골이 된다는 것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리는 것

우리 집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 옆에는 빵집이 하나 있다. 오전 7시,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노오랗게 불이 켜진 동네 작은 빵집에는 사람들이 많다. 빵집에 들어서자마자 긴 줄을 기다리고 있자니 버스에 타기 전에 급하게 빵을 사는 직장인, 며칠 뒤 있을 행사에 쓸 케이크를 주문하는 아주머니, 창가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다정한 노부부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보인다.


앞사람들이 쭉쭉 빠져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안녕하세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빵집 아주머니는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좋은 아침이에요! 카임링(빵이름) 한 개 맞죠? 그리고 카드계산?”


“맞아요!”


이제는 주문을 하지 않아도 먼저 말씀해 주신다. 빵을 건네받으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면 아주머니도 오늘 좋은 하루 보내길 바란다고 답인사를 해주신다. 이렇게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며 매일 빵을 사서 작은 뽀로로 가방에 우유와 함께 넣어줬다. 어린이집에서 아침, 점심, 간식이 제공되지만 아이가 독일음식을 낯설어해서 비상식량으로 챙겨 보낸다. 어린이집 밥을 잘 안 먹은 날은 내가 챙겨 보낸 것들이 다 비워져서 돌아오기도 하고 밥을 잘 먹은 날에는 하나도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돌아오기도 한다. 가장 반가운 날은 안에 있는 것들을 손도 대지 않아 여전히 묵직한 가방을 건네받았을 때다. 되돌아오는 가방의 무게는 아이가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로 쓰이고 있다. 이런 루틴 덕분에 나는 매일 같은 시간 빵집에 가서 같은 빵을 똑같은 계산 방법으로 사게 되었다. 그리고 빵집 아주머니는 나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단골이 된 것이 뭐 호들갑 떨 일인가 싶지만 나한테는 꽤나 의미가 큰 일이다. 나는 2012년부터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중간에 한번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승무원이다. 승무원의 장점은 여기저기 이 도시 저 도시를 여행객처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도 저곳도 속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남을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이게 참 좋았다. 지구 곳곳 가서 24시간에서 길게는 72시간 머물며 관광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그 나라의 삶을 아주 잠깐 맛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쁨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공허함이 채우기 시작했다. 매일 새로운 동료들과 일을 하고 새로운 장소에 가고 새로운 것들을 접하는 삶이 의미가 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나도 결혼을 하고 나니 휴가 때 한국에 들어가면 아기를 낳은 친구 집에 놀러 갈 기회가 생기곤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스한 향기가 풍기고 친구가 잘 일구고 정성스럽게 꾸민 집에 새근새근 자는 아이는 정말 이상적인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 저번에 6개월 필라테스 회원권 끊은 거 다 쓴 거 있지. 재등록할지 말지 고민이야."


친구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6개월 회원권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 삶에 6개월 회원권은 존재하지 않는 옵션이었다. 항상 비행을 다녀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기에 정기적으로 어딘가에 등록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않은 자유롭던 새는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한 외톨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임신과 육아휴직으로 인해 이제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공간에서 살짝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아이 덕분에 매일마다 어린이집에 등교해서 같은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묻고 매일 동네 같은 슈퍼에 가서 장을 보고 아침에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며 빵집 아주머니와 안면을 트는 사이가 되었다. 20대 초중반엔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반복되던 삶은 이제는 안정감과 무르익는 깊이감이 느껴지는 삶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나의 집에서 사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 친구와 다음 주에 만날 약속을 하는데 스케줄 표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기의 다다음달에 있을 병원 예약을 빠지지 않고 갈 수 있다는 것! 예측 가능한 삶! 지금이 참 좋다.


아기의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할 때 두려운 것도 많았으나 이런 생각지 못했던 장점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이의 성장으로 인해 내 삶도 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것 같아 감사하다. 이렇게 몇 달 보내다가 또 답답하다며 글을 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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