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마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전 11시 45분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에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띠띠띠띠 비밀번호를 누르고 어린이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늘따라 선생님이 나를 보고 유난스럽게 반가워하며 인사를 했다. 오늘 선생님 기분이 유난히 좋으신가~? 오늘따라 살갑게 맞이하는 선생님이 눈에 띄었지만 깊게 생각할 겨를 없이 교실로 들어갔다.
어? 이상하다? 멀리서 보이는 아이의 얼굴이 부어있었다.
“엄마 왔어~ 이리 와! 옳지!” 하며 안아 든 아이와 인사할 새도 없이 오른쪽 눈의 시퍼런 멍이 눈에 보였다. 아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자마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어머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팠어?" "로빈이 쿵해쪄?" 말도 못 알아듣는 아이에게 속사포로 놀란 마음을 숨길 새도 없이 말이 다다다 튀어나왔다. 선생님도 한국어를 못 알아듣지만 다 알아들은 모습이었다.
아이의 오른쪽 눈과 눈썹 사이에 얇고 길게 뭉친 피딱지가 있고 그 주변으로 퍼런색과 힐끗힐끗 보라색이 보이는 멍이 있었다. 옆에 있던 선생님은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오늘 교실 안에 있는 미끄럼틀 근처에서 놀다가 엎어져서 눈 쪽을 부닥쳤어요. 바로 차가운 아이스팩으로 진정을 시켰어요. 여기 아이스팩을 하나 더 준비했는데 집에 가는 길에 혹시 필요하다면 가져가도 좋아요. “ 라며 미안하다는 말은 안 했지만 한껏 안타까운 얼굴을 보이며 준비해 둔 아이스팩을 나에게 건넸다. 늦게 걸음마를 떼서 16개월인 지금도 아장아장 뒤뚱뒤뚱 불안전한 걸음을 걷고 있기에 집에서도 항상 어딘가 부딪힐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이렇게 다쳐오다니...
어린이집을 보내면 다쳐서도 올 것이고 아이들끼리 싸움을 할 수도 있고 또 온갖 질병에 걸려서 아플 것도 각오했지만 이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나를 보며 방긋 웃는 아이가 넘 안쓰러웠다. 이 정도로 다쳤다면 분명 아이도 크게 놀라고 엄청나게 울었을 텐데 그 순간에 엄마가 옆에 없었다니 얼마나 무섭고 불안했을까.. 내가 밖에서 커피와 빵을 즐기고 있던 그때 우리 아이가 다쳤다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그랬을까 나 자신에 대한 책망이 커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유치원에 있는 미끄럼틀을 생각해 보니... 우리 유치원은 에미 피클러라는 사람이 세운 교육방침을 따르는 유치원이라 미끄럼틀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사다리 같은 곳에 원목 판때기 하나 뚝 올려둔 모양인 것이 생각났다. 거기에 눈을 찧었다니 마음이 더 쓰렸다.
불현듯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등교해서 삼십 분 남짓 있었을 때 주방놀이가 엎어질뻔한 장면이 생각났다. 내 옆에서 주방놀이를 가지고 놀던 아이가 싱크대 부분에 배를 깔고 매달렸더니 주방놀이가 기울어서 내 쪽으로 천천히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슬로모션으로 보인건지 실제로 슬슬 쓰러진 건지 자세한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 아이가 매달린 채 쓰러지던 주방놀이를 내가 손을 번쩍 올려서 탁 잡았다. 다행히 아이도 무사했고 그 아래 앉아 있던 나와 나의 아이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선생님도 아이도 나도 모두 놀랬지만 어른이 놀랜걸 티 내면 아이들이 동요할 수 있기에 우리는 얼른 주방놀이를 다시 세우고 놀이를 이어간 적이 있었다.
"아휴! 선생님 한 명당 맡는 아이가 3명밖에 안되는데! 그리고 그나마도 애들이 매일 다 나오는 게 아닌데 그걸 못 본 거야? 그 미끄럼틀 진짜 위험하게 생겼었다니까? 저번에 주방놀이 넘어졌을 때도 엄청 위험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풀이 아닌 한풀이를 했다. "근데 그런 거 다 생각하면 유치원 못 보내고 끼고 있어야 하는데 그건 또 못하잖아. 어쩌겠어. 이런 거 저런 거 다 감수하며 보내는 거지." 우리 아이보다 큰 아이를 키우는 친구는 나를 위로했다.
맞다 맞아. 아이를 언제까지나 온실 속 화초처럼 끼고 살 수 없다. 어린이집 등원과 함께 사건 사고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했어야 하는데 그럴 리 없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 하루 이틀 미뤄갔던 게 이렇게 날벼락처럼 찾아온 것뿐이다.
육아에 필요한 건 체력과 돈뿐만이 아니다. 담담한 마음, 줏대, 결정력 등 다양한 것들이 요구된다. 내가 나 혼자 세상을 살아갈 땐 손해를 봐도 내가 잘못한 것이라 감당이 가능했고 모든 것은 내 책임이었다. 아이를 키우니 내가 느리거나 내가 잘 못하면 아이가 손해를 보게 된다. 책임감이 두 배가 늘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 아래 아이가 물을 뱉거나 짜증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내가 뭘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 같은 죄책감도 크다. 물론 이런 감정도 존재하지만 뭔가를 잘하거나 애교를 부리면 요건 나한테서 간 걸까 남편에게서 온 걸까 상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이런 간질간질한 것들은 글로 적기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의 눈두덩이는 여전히 퍼렇게 부어있다. 찧은 곳에 두둑하게 연고를 다시 한번 발라줬다. 제발 흉 지지 말고 새살아 돋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