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집 和
나는 영화를 보고 나면 내가 가졌던 뜨거운 느낌을 너무 빠르게 상실해버려 슬퍼지곤 한다. 그래서 생각이나 감정을 붙잡아두기 위해 아주 간단하게라도 감상을 적어둔다. 그 감상의 형태는 논리적인 글이 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가사와 비슷하게 나오기도 한다. '로제타'의 가사는 그 감상들 중 하나였고 1집 앨범 중에서 유일하게 예전에 써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사를 노래로 발전시켜 이 앨범에 두기로 한 것은, 과거의 내가 쓴 글이 그 당시의 나를 예언처럼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궁창 속에서 희망을 보았던 밤
당연히 희망은 그녀를 스치기만 해
알잖아 그녀는 웃을 수도
춤을 출 수도 있는 여자야
알잖아 그녀는 사랑할 수도
꿈을 꿀 수도 있는 여자야
로제타 그녀를 구해줘
로제타 그녀를 안아줘
엄마처럼 살아갈 수도 없었던 밤
우스운 현실은 죽음마저 선택 못 하게 해
알잖아 그녀는 아이일 수도
어른일 수도 있는 여자야
알잖아 그녀는 힘을
그녀는 빛을 품은 여자야
로제타 그녀를 구해줘
로제타 그녀를 안아줘
사랑하려 할수록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려 할수록 사랑하게 되지
그녀의 마음을 마주할 유일한 당신
로제타
다르덴 형제 감독의 작품 '로제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제타는 알코올 중독인 엄마와 단 둘이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다. 원래 다녔던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평범한 삶을 위해서 발버둥을 친다. 헌 옷을 수선해서 팔고, 음식을 구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고, 와플 가게에서도 일하게 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담담하게 풀어지는 이 암울한 영화 속에서 나는 빛나는 로제타를 본다. 친구와 춤을 추며 처음으로 지어보는 웃음을 짓는 로제타, 자기 전에 꿈을 꾸는 표정의 로제타, 아이처럼 놀다가 어른처럼 생계를 책임지는 로제타. 힘과 빛을 가진 로제타. 하지만 빛나는 로제타는 지독한 가난의 색으로 칠해진다.
나는 엄마가 사라져 가는 세상 속에서 슬픔의 색으로 칠해졌다. 그 색 밑에 나의 빛이 아직도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밝은 색을 가진 사람들에게 듣는 희망을 믿을 수 없었다. 로제타의 색을 가진 사람에게 듣는 희망만을 믿을 수 있었다. 나의 슬픔의 색 밑에 나만의 빛이 빛날 수 있다고 로제타에게 긍정받고 싶었다.
가사 속 '그녀'는 나이기도 하고, 슬픔의 색에 가려진 모두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의 구원이 되어 다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가 그 빛의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뮤직비디오 연출노트>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라는 명제만큼 당연한 것도 없지만, 삶 속에서 죽음은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죽어가는 존재인 주제에, 우리는 우리가 죽음을 선택할 때 혹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가 되어서야 죽음의 의미를 고찰하게 된다.
그렇게 빛났던 눈동자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선고처럼 나의 엄마는 올해 봄을 모두 견디지 못하고 하늘로 가셨다. 그 이후로 모든 기분과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고, 나는 살기 위해 곡을 썼다. 그렇게 9곡이 나왔다. 로제타의 가사는 9곡 중 유일하게 몇 년 전에 썼다. 이 곡이 타이틀이 된 것은, 이 가사가 스스로를 향한 예언이었던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역설적으로 삶의 의지를 찾았다. 나는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 앞에서 내 삶의 귀중함을 죄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이 과정을 이번 1집 총 9곡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다. 개별 곡들도 하나하나 의미가 있지만 이 9곡 전부를 순서대로 들었을 때,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기를 바랐다. 더 나아가, 뮤직비디오에도 이 방향성을 적용하고 싶었다.
나는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방향성이, 단테 ‘신곡’의 구성인 지옥-연옥-천국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시작한 내 음악의 무대는 ‘지옥’이어야만 했다.
지옥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장치들을 넣는 것보다도, 색을 사용하는 것이 더 직관적이고 강렬할 것이라 판단했다. 뮤직비디오의 색감이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의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와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붉게 져가는 태양의 빛을 붙잡고 싶기라도 하듯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모습을 비현실적인 조명을 통해 연극적 과정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단테가 천국을 가기 위해 지옥을 여행하듯, 나는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여행해야 했다. 죽음의 무대로 빌린 지옥의 배경에서, 삶을 억압하고 더럽혔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악한 모든 것을 대변하는 장치로, 가톨릭 대사전의 ‘7 대죄’를 빌려왔다. 7 대죄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지은 모든 죄’(peccatum proprium)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로, 탐욕, 나태, 질투, 식탐, 분노, 교만, 색욕이 이를 구성한다.
뮤직비디오의 첫 장면에서 나는 왼손으로는 거울을, 오른손으로는 천과 밧줄을 쥐고 있다. 거울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게 객관적인 시선을 빌려주는 매개체이다. 그러나 뮤직비디오에서는 거울이 어떤 것을 비추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첫 장면 이후 천에 쌓여 7 대죄를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커질 뿐이다. 이것은 삶을 더럽힌 악을 향한, 죄를 향한 부끄러운 시각을 나타낸다.
지옥에서의 여정에서 내가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는 죄는 ‘탐욕’이다. 자기의 발보다 훨씬 작은 아기의 구두를 신으려는 여자를 나는 스쳐 지나간다. 피 묻은 손과 억지로 걸으려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탐욕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죄는 ‘나태’이다. 희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는 마른 사내는 나태를 나타낸다. 이 사내는 그 죄의 이름처럼 어떤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나와 나란히 걷는다.
다음 장면에서 등장하는 흰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질투’를 상징한다. 자신의 거울보다 큰 거울을 끌고 가는 나를 향해 소녀는 질투한다. 그리고 그 질투의 끝은 자살로 이어진다. 노래의 가사 ‘구해줘’와 함께 들리는 총성 소리는 질투의 끝에 죽음을 선택한 모순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2절부터는 1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가 된다. 1절이 죄를 하나씩 지나치며 공간적으로 지옥에서 이동하는 느낌을 준다면, 2절은 같은 공간에서 시간적으로 지옥을 이동하는 느낌을 준다.
2절 이야기는 타오르는 드럼통 주위에서 진행된다. 불이 타오르는 드럼통은 ‘분노’를 상징한다. 드럼통 안에 들어가 있는 나의 사진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또 다른 나를 태운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분노라는 감정은 결국에는 자신을 태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나란히 걷던 담배 피우던 사내는 어느덧 사라지고 드럼통 왼편에서 내가 사내의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태는 결국 소멸로써 그 상징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드럼통 오른편에는 라면을 먹는 남자가 있다. 그는 ‘식탐’을 나타낸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는 확성기를 든 키 큰 여자는 ‘교만’을 의미한다. 누가 등장하든 말든 계속해서 먹는 남자와 자신의 주장만을 강요하는 여자는 서로 소리를 지르며 밀치고 싸운다. 죄와 죄는 같은 분류로 묶이면서도 결코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옆에는 TV가 놓여 있다. 그리고 TV에서는 ‘색욕’을 담당한 포르노 장면이 나오고 있다. 나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TV를 드럼통으로 던진다. 이는 죄가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으로 모든 죄의 수렴을 보여준다.
나는 모두에게, 어떤 사물에게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다만 죄가 지나간 후 거울의 크기가 커질 뿐이다. 이는 나도 모르게 삶에서 죄를 저지르고 더럽혀진 것을 나타낸다. 모든 죄를 지나친 후의 거울은 내 몸 보다도 훨씬 더 커져있다. 억지로 나는 그 죄들을 끌고 걸어가지만, 끝내 나는 불어난 죄에 깔려 쓰러진다. 나는 벌을 받았다.
다시 일어난 피투성이의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제 지옥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겠다는 의지적인 모습이다. 그렇게 노래는, 그렇게 지옥은 끝이 난다. 하지만 영상은 끝나지 않는다. 단테가 지옥에서 벌을 받고 연옥에서 속죄의 과정을 거치듯이 나는 노래가 끝난 후에 모든 죄를 땅에 묻으며 속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