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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코포니 Jul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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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和

 아직도 나는 그 슬픔에 멈춰있다. 엄마가 사라졌다고 해서, 나는 엄마를 없앨 수 없다. 상실은 존재를 투영한다. 오히려 사라졌기에 더 강렬한 각인으로 남아있다. 엄마는 죽음으로써 나와 더 가까워졌다. 그것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의사로부터의 선고시점부터 계속해서 나는 이 죽음을 부정하려 애썼다. 부정할수록 절망이 나를 뜨겁게 태웠다. 앨범 초반의 곡들이 터질 듯한 빨간 색인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그리고 바보같이 나는 절망 속에서 절규하면서도 이 절망에서 벗어나기도 무서웠다. 이 뜨거운 감정이 끝나면 까만 재가 될까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가야만 했다. 나는 이곳에 아직 있으니까. 살아가기 위해 엄마와 내가 겹쳐간 시간, 그러니까 나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엄마가 없는 내 앞의 시간을 본다. 을씨년스럽다. 한걸음 앞으로 걷는다. 엄마의 죽음을 인정한다. 엄마의 죽음을 잊지 못할 것을 인정한다. 한걸음 또 걷는다. 엄마의 죽음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인정한다. 한걸음 또 걸을 수 있을까. 힘을 내서 다시 한 걸음 걷는다.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다시 이 죽음으로 나의 감정은 돌아올 것임을 인정한다. 


 고통을 껴안을 때 조금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조금 편안하다. 한 걸음 더 걸을 수 있다. 엄마의 죽음으로 무한한 감정을 느낀 것을 인정한다. 걸으며 앞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엄마의 영원한 죽음으로 나는 엄마 대신 꿈을 꿀 수 있음을 인정한다. 걸으며 노래를 부른다. 엄마가 가진 불행도, 엄마가 가진 행복도 이제 전부 나의 것임을 인정한다. 아, 영원하다. 이 슬픔은. 그리고 이 사랑은.

 


시간을 멈추겠다는

소년의 장난대로

나는 멈춰버렸어


돌고 돌아도 결국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와 버렸어


잃어버린 기억도

모르겠는 내일도

괜찮다고 

영원히 속삭이네


그대의 품

그대의 눈

그대 그대


그대의 꿈

그대 속에서 

나 나


소리도 없이

색채도 없이

나는 멈춰 버렸어


뛰고 뛰어도 결국

다시 그 시간으로

들어와 버렸어


흔적뿐인 상처도

손금 위의 불행도

괜찮다고

영원히 속삭이네


그대 나 그대 나 

그대 나 그대 나


 

 나는 이 마음이 하얀색 같았다. 거누에게 기타를 부탁할 때에도 '하얗게' 쳐달라고 부탁했다. 믹스를 할 때에도 하얀 눈 밭을 떠올려 달라고 했다. 


 하얀색. 텅 빈 색. 그렇기에 가득 찬 색. 겨울의 색. 그렇지만 따뜻한 색. 엄마를 잃은 나. 그렇기에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나. 슬픔의 나. 그렇지만 따뜻한 삶.







"내가 떠오른 생각은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삶이라는 이쪽 강에서 죽음이라는 저쪽 강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삶과 죽음을 왔다 갔다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진자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듯, 숨을 토하는 게 죽음이고 들이마시는 게 삶인 것이지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삶이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드는 것이 죽음이라고 표현했던 고대 철학자들의 말보다 더 생생하게 와 닿지 않나요?


 자영 언니가 뮤직비디오 회의를 하다가 알려준 책의 한 구절이었다. (제목을 까먹었다고 해서 출처를 찾을 수 없습니다. 혹시 알고 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숨을 토하는 게 죽음이고 들이마시는 게 삶'이라는 문장이 이상하게 와 닿았다. 숨을 토하고 들이마시는, 죽음과 삶의 과정을 영상을 통해서도 재현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카메라가 호흡과 함께 움직이게 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내가 '엄마'의 역할을 금원씨가 '딸'의 역할을 맡았다. 세상을 떠나려는 엄마는 숨을 내뱉으려 하고, 딸은 엄마를 이 세상에 붙잡으려 한다. 딸은 엄마에게 약을 주고, 간호를 한다. 어떻게든 살리려 한다. 하지만 엄마는 어떠한 미동도 없다. 죽음을 상징하는 숨을 내뱉는 움직임을  딸의 모습으로 끝낸 것은 엄마의 죽음을 막고 싶은 딸의 간절함을 표현한다.


 사랑도 없이 엄마의 죽음을 막으려는 사람들을 본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위로 속에서 구토를 느낀다. 엄마의 입장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입장만 있는 사람들. 문득 나의 모습과 그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엄마를 보내주어야겠다고 느낀다. 



 이제 더 이상 엄마의 숨을 가로막는 것이 없다. 숨을 내뱉고 죽음으로 간다. 죽은 엄마를 감싸는 딸.  엄마의 죽음으로 하나가 된 하얀 우리.



 4시 16분을 넘어가지 못했던 시계는 다시 원래대로 흘러간다. 엄마가 죽은 날인 4월 16일 이후의 삶이 그려진다. 그리고 멘보샤를 엄마에게 전해준다.


 나는 멘보샤를 엄마가 죽은 후에야 처음 먹어 보았다. 사실 엄마가 병실에 있을 때 겉은 바삭하다가도 폭신하고, 안에는 새우가 들어있는 요리를 봤다며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에 무슨 요리인지 감도 오지 않아서 엄마에게 새우튀김을 사들고 갔다. 엄마는 그 당시 새우튀김을 별 말없이 먹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나서야 나는 ‘멘보샤’를 먹게 되었고, 먹는 순간 엄마가 말했던 음식이 이거였구나 깨달았다. 나는 엄마가 텔레비전에서만 이 음식을 보고 먹어보지는 못했구나 생각이 들어서, 정말 너무 슬펐다. 왜냐면 지나치게 맛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노력해서 이 요리를 찾아볼걸, 이 음식을 맛보지 못하고 떠난 엄마 생각에 마음 한켠 죄책감이 언제나 있었다. 


 작업실 옆에 멘보샤가 맛있는 중국집이 있다. 회원가입비를 내면 할인가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가입을 하고 나서는 처음으로 그 음식점에서 밥을 먹었다. 카운터에서 회원이라고 하니 전화번호 뒷자리를 물어보았다. 네 자리를 대답했고, 나와 같은 전화번호 뒷자리를 가진 사람들의 목록이 스크린 위에 나왔다. 나는 내 이름 위에 엄마의 이름을 보았다. 나는 엄마가 멘보샤를 먹어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엄마는 미래의 내가 멘보샤를 먹을 가게에서 먹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엄마가 떠나기 전에 직접 주지 못해서 늘 미안했다. 멘보샤를 한 참이 지나서야 주었다.


 늦게 줘서 미안해 엄마. 



카코포니 - White MV 

https://youtu.be/1enlSErmv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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