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케르, La Bibliotheque de Thorvald Boek
"취미가 뭐예요?"란 말을 들은 누군가가 "독립서점 찾기에요"라고 대답하면 성의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 대화를 빨리 끝내려고 아무 말이나 하는 것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진심으로 독립서점 찾기를 좋아한다. 포켓몬 도감 말고 독립서점 도감을 들고 다녀야 할 기세다. "독립서점 탐방기로 책도 후루룩 쓸 수 있겠어." 아내가 진지하게 제안할 만큼이다.
그래픽 노블만 한 상을 차려놓은 곳, 햇빛에 눈을 가린 채 인상 쓰며 졸고 있는 고양이를 볼 수 있는 곳, 오전에는 문을 닫고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만 운영하는 곳, 구석 자리에서 하우스 와인을 들고 독서 삼매경에 빠질 수 있는 곳 등…. 그간 많은 독립서점을 다녔다. 우린 여행지에서도 그 일대에 흩뿌려진 독립서점부터 둘러봤다. 춘천, 제주 등에서는 가야 할 곳이 한가득이었다. 가봤더니 너무 좋아서, 몇 번씩이나 다시 찾은 독립서점도 상당수였다. 이런 사정으로 일정이 빽빽해지면, 그 도시에서 최고로 맛있다는 맛집 일정을 빼서라도 소화하곤 했다. 우린 그만큼이나 독립서점에 진지했던 것이다. 여행지에서만 그럴까. 운 좋게 아무 일정 없는 주말을 맞으면, 우리 두 사람은 동네 한 곳을 골라 근처의 독립서점들을 '격파'했다. 용산구 이태원동, 마포구 망원·연남동, 종로구 통인·가회동 등 군락지(?)로 분류되는 동네들은 모두 둘러봤다.
그렇다면 왜…?
당연한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둘은 책을 좋아한다. 책 표지의 꺼끌한 감촉도 좋아하고, 쥐고 후루룩 넘길 때 묘하게 전해지는 먼지 묻은 종이향도 좋아한다. 이와 함께, 독립서점은 우리의 대화 주제와 관심사도 풍성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우린 제주도를 찾으면 꼭 들르는 독립서점이 있다. 차를 주문하면 주인장의 책 콜렉션을 양껏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둘은 지긋이 앉아 만화책으로 된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지긋이 읽었다. 대형 서점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러고는 흰 고래에 복수하기 위해 생을 지탱해온 선장 에이햅, 이를 무모한 짓이라고 만류하는 1등 항해사 스타벅 중 누가 더 고귀한 인물이 될 수 있는지를 토론했다.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를 찾아 함께 감상키도 했다. 그런 식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독립서점이 나름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독립서점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도 만끽했다. 주인장은 거의 백퍼센트 차분함을 갖춘 상태였고, 손님들 중 열에 아홉은 훅 불면 날아가는 깃털을 챙겨온 양 다소곳이 움직였다. 나와 아내는 시끄럽고 북적대는 곳으로만 가면 기가 빨려 찐득하니 녹아내리는 사람들이었다. 독립서점마다 묘하게 콘셉트가 다른 점도 흥미를 자극했다. 주인장이 치열하게 했을 고민의 흔적에 퐁당 발을 담그는 것 같았다. 보다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그들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듯한 약간의 관음(觀淫)적인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다. 책 구성도 다르고, 주인장이 추천하는 작가와 장르도 모두 상이했다. 십여년 전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만나면 악수를 하고 싶었다. 읽다가 포기한 책 내지 흥미가 없어 손길조차 주지 않은 책도 가끔 보일 때면 그렇게 반가웠다. 이런 주제를 갖고 이런 책을 쓸 수 있단 말이야?…. 가벼운, 그럼에도 진지함이 느껴지는 책을 보는 일 또한 독립서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함이었다.
우린 독립서점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난 후에는 근처 카레집을 찾아 따뜻한 밥을 먹고, 예쁜 카페를 찾아 정성껏 내려주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렇게 일정을 매듭 지으면, 그날 하루는 정말로 보람찼다.
이런 가운데, 우리 부부가 독립서점 찾기만큼 진심으로 대하는 취미가 하나 더 늘었다.
대단치는 않다. '독립서점 찾기' 수준이다. 그 취미는 산책이다. 독립서점에 이어 뭐…? 얘는 정말 장난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진심이다. 우리는 운동 겸 산책 삼아 청계천 길을 걷고, 또 걷고 있다. 말 그대로 틈만 나면 가고 있다. 한 사람이 "청계천 갈까?"라고 물으면, 옆 사람이 "응. 좋아."라고 끄덕이는 식이다. 둘 다 집 안에서 나뒹구는 옷을 대충 걸쳐 입곤 어기적 어기적 움직인다. 한 번 걸으면 5~7㎞ 정도씩은 걷는다.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가 쓰인다. 한 달 동안 걸은 거리를 합했더니 100㎞가 족히 넘은 적도 있었다. 걷다가 그대로 독립서점을 찾아다닐 때도 많다. 아, 진짜…. 어디선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요즘 들어 우리가 본격적으로 청계천 길을 걷게 된 계기는 한 TV 프로그램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지금은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한 아이돌 그룹이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는 10부작의 작품이었다. 이 사람들은 정말 걷기만 했다. 예능이었지만, 엄밀히 보면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 우리는 1~2주만에 이 프로그램을 몰아서 다 봤다. 별 생각 없이, 이 사람들이 때로는 헛소리(?)를 하며 걷는 것만 봐도 마음 속 묵직한 무언가가 뭉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모두가 그 고생 끝 목적지에 닿아 부둥켜안는 장면으로 끝났다. 그리고, 둘은 약속한 듯 서로에게 제안했다. "같이 걸을까?" 이제 곧 맑은 공기까지 사고 파는 시대가 온다지만, 청계천 산책은 언제나 공짜였다. 우리 둘은 주로 평일과 주말, 휘영청 달이 떠 있을 때 손을 잡고 걸었다. 그 아이돌 그룹처럼 하루에 20㎞씩은 못 걸어도,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는 열심히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우리는 청계천을 걸으면서 종종 최근 들른 독립서점에서 읽은 책 이야기를 또 한다. 이 덕분에 이야기를 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 생의 낙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우리에게선 몸 속 독소(毒素)를 해소하고 삶의 저변을 넓혀가는 시간이다.
이야기를 하나만 더 붙이자면, 얼마 전부터 꿈도 하나 더 늘었다.
아주 친한 친구가 집 근처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우리가 가끔씩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그 곳을 봐주는 것이다. 찾아오는 이에게 우리 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고, 종종 방문하는 단골 손님에겐 차를 내어주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올 때, 근처 가게에서 카레를 한 그릇씩 비우곤 노을 길을 산책하며 서로 책 이야기를 하면 충만하겠다. 책임은 떠넘기고(?) 낭만만 취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게 '꿈'의 매력 아니겠는가.
보는 이의 설렘이 그림에서 물씬 느껴집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여류 화가였던 하리에트 바케르는, 필시 책과 동네 서점을 즐기는 이였을 것입니다. 책이 뿜는 먼지 향, 동네 서점이 품은 나무 향에 젖어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빈틈없이 빼곡하게 채워진 다채로운 책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낡은 책상과 다리 얇은 의자가 빈티지한 감성을 더해줍니다. 창문을 통해 슬쩍 들어오는 빛이 화룡정점입니다. 책장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햇빛 속을 유영하는 먼지 가루가 보이겠지요. 오래된 나무 냄새가 진동하겠지요. 동네에 이런 독립서점이 있다면, 아예 베개와 이불을 들고 와 (물론 그러면 안 되지만)살림을 차릴려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공간, 너무 마음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