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점심 식사
새해가 시작되는 이 날, 우린 서로의 소울푸드를 챙겨 만나기로 했다.
"야, 넌 너무 대충 가져왔다." 영화광인 형은 내가 들고 온 음식을 보고 장난스레 농을 했다. "왜, 난 클래식하고 좋은데." 철학을 전공했다지만 여태 철학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그 대신 만나기만 하면 막걸리에 관한 지식만을 뽐낸 동생이 나를 대신해 받아쳤다.
나는 그냥 웃었다. 우리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 셋은 한 회사에서 같은 인턴 사원의 신분으로 만난 사이였다. 어쩌다보니 한 조가 된 우리는 서로 돌아가며 화개장터 같던 복사기 옆자리에 앉는 희생을 선보이는 등 나름의 우애를 보였다(회사에서 인턴이 찜하고 앉을 자리 따위는 없었다). 일이 잘 풀리면 밤새도록 마른 노가리 따위를 뜯어먹으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또 밤새도록 마른 오징어 따위를 쭉쭉 찢어먹으면서 펑펑 울었다.
우리는 모두 미생(未生)이었다. 그때 나는 참 자주 술병에 걸렸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우리는 많은 순간 술을 필요로 했고, 이 때문에 술 자리는 잦았고, 그때마다 우리는 주로 웃거나 울먹였다. 우리 셋의 지긋지긋한 인턴 생활은 지난해 12월 31일로 마지막 출석 도장을 찍었다. 회사는 무관심했다. 그들에게 인턴이란 때 되면 물러나는 썰물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인턴 사원증을 뗀 우리는 우리만의 파티를 바로 그 다음 날에 열기로 했다. “마지막 월급도 받았잖아, 이 날만큼은 꿉꿉하게 노가리나 오징어 따위 구워먹지 말자. 너네가 가장 좋아하는 소울푸드 하나씩 갖고 우리 집으로 와.” 마포구 망원동에서 월세살이를 한 영화광 형의 제안이었다.
영화광 형은 통통한 새우가 얹어진 잠발라야와 머스타드 소스를 곁들인 핫도그를 챙겨왔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입맛에 잘 맞아 즐겨 먹었다고 했다. 철학하는 동생은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함께 이름도 처음 듣는 막걸리 다섯 병을 들고 왔다. 그 동생은 치즈와 막걸리가 세상 제일 가는 환상의 조합이라고 설파했다. 어렵게 공수해온 이 막걸리들을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시지 않는다면, 누구도 온전히 집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내가 보온 냄비에 담아온 것은 다진 소고기와 계란 고명이 올라와 있는 떡국이었다. 딱 세 그릇의 양이다. "그래서, 왜 떡국이 소울푸드인데?" 두 사람은 막걸리 병 뚜껑을 돌리다 말고 내게 물었다.
“아이고, 얘를 어찌할꼬."
엄마는 이제 막 알파벳을 더듬더듬 읽으려고 하던 때의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젖은 눈망울을 글썽이면서도, 애써 채소 반찬만 집어먹던 내 모습을 보고서였다. 어릴 적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종목과는 상관없이 고기만 먹으면 온 몸이 뒤집어졌다.
일종의 알레르기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당시 미숙아였다. 양 볼에는 마른버짐이 폴폴 피어났고, 툭하면 팔이 빠져 병원에 가야 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저녁 식사를 늘 함께 했다. 아빠와 엄마, 형과 나. 손재주가 좋은 엄마는 당연히 요리도 잘했지만, 그 쯤에는 주로 소박한 음식들을 만들었다. 간장 양파조림과 곧게 뻗은 파절임, 아삭한 오이소박이가 떠오른다. 이런 소박한 음식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를 배려하는 일이기도 했다.
매번 내 등을 쓸어내리면서 한숨을 쉰 엄마는 이 세상에 맛있는 게 충분히 많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당시 TV에서 하는 모든 요리 프로그램을 섭렵했다. 시간이 안 맞을 때는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를 할 정도였다. 고기 맛이 난다는 말에 '콩 고기' 요리법을 배웠고, 고기 없는 두부 갈비찜을 익히기도 했다.
나는 늘 배가 고팠다. 맛있는 음식만 한 입 가득 먹을 수 있다면 얼굴이 붉어지든, 팔과 다리에 오돌토돌한 게 올라오든 상관 없는 시기였다. 그런 애가 찌개 안에서 살포시 졸고 있는 고기조각을 보고도 감자, 당근만 꺼내 먹었다고 하니 그때의 엄마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래도 미운 사내 아이였는지, 종종 생떼도 썼다. "아빠도 먹고, 형도 먹는데 나만 왜 못 먹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억지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설핏 스친다.
그런 내가 전환점을 맞았다. 언제였는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아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가족 모두 빙 둘러 앉아 떡국을 떠먹고 있을 때였다. 한 숟가락 크게 떠먹은 나는 입 안에서 고기 맛이 느껴졌다. 떡국을 개인 접시로 옮겨담는 중 몰래 딸려들어온 게 아니었나 싶다. 뱉을까 하다가, 용기를 내 꼭꼭 씹었다. 그런데, 꼴깍 씹어 넘기고도 몸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당장 몸이 붉어지고 속이 답답해져야 할 터였다.
"엄마, 나 이거 먹었는데 괜찮아." 화들짝 놀란 엄마는 내 이마에 열을 짚고 팔 다리를 살펴봤다. 역시 이상반응은 없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푹 익은 고기를 잘게 잘라왔다. 내게 조심스레 한 입을 떠먹였고, 나는 맛있다며 오물오물 씹어댔다. 원래라면 그때부터 낑낑대야 했던 애가 "나 하나 더 먹어도 돼?"라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엄마는 접시를 내려놓고 나를 꼭 안았다. 그 품은 무척 따뜻했다. 나는 얼굴을 가슴 속에 파묻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 속 큰 짐을 하나 내려놨다.
그날 이후 엄마의 요리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부엌에선 늘 콧노래가 들려왔다. 국자와 접시가 맞부딪히는 소리도 경쾌했다. 온 가족은 어떤 점심 특선이 나올지를 기대했다. 내게 잘게 잘린 고기가 들어간 떡국은, 그런 면에서 잊지 못할 소울푸드였다.
"웬 떡국이냐…. 야, 난 그때 무슨 이상한 콘셉트를 잡고 온 줄 알았어."
"오빠. 이제 와서 말하지만, 떡국 담긴 냄비를 처음 봤을 때는 좀 그렇긴 했지."
우리 세 사람은 각자 다른 곳에 취업하고서도 종종 마주하고 있다. 떡국 한 그릇에 그리 절절한 사연이 있을 일이냐…. 그럼에도 두 사람은 지금도 틈만 나면 장난스레 놀리곤 한다. 이들은 당시 소울푸드에 대한 스토리텔링에서 완패를 선언했다. 사실 첫 수능시험을 치고 온 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먹은 첫 음식도 떡국이었다. 몇몇 회사의 최종 면접을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되는 그 많은 날, 눈물 콧물 질질 짜며 먹은 음식도 떡국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은 데 대해 안도했다. 놀림이 5년치는 더 적립됐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 전, 세상을 욕하기 위해 또 비좁은 식당에서 만났다. “그만 놀리고…. 나 배고파. 음식부터 주문하자.” 내가 제안한다. 그러면 우리 셋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리친다. "사장님, 여기 떡국 있어요?"
색채가 가득 넘쳐 흘러내리는 듯한 정원 한가운데 놓인 식탁 위 오른 빵과 과일, 연한 차…. 왼쪽 귀퉁이에 앉아있는 클로드 모네의 아들 장은, 어쩌면 이날 맞은 음식들을 그의 소울푸드로 간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음식 맛은 더할나위 없었겠죠. 사이 좋은 부모님과 저지귀는 새, 힘껏 향을 뿜어내는 작은 꽃송이 등 조미료도 하나 하나 완벽했을테니까요. 아버지가 직접 가꾼 구름 같은 정원에서 먹는 촉촉한 음식…. 그에게 잊지 못할 풍요로움을 선사했을 것입니다.
특별할 것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언제든 떠올리면 뭉근한 감정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음식이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의 소울푸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