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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Oct 04. 2020

"묻겠습니다.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르네상스 특집 3 : 라파엘로 산치오, '라 포르나리나'>

   묻겠습니다.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라파엘로 산치오. 그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로마의 작은 빵집 점원으로 생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508년 4월, 유난히 비가 많이 온 어느 휴일이었지요.


   정말 운명이란 건 있는 걸까요. 종종 생각합니다. 그날 제가 빵집 일을 하지 않고 쉬었다면, 일을 했더라도 굳이 저녁 마감 일을 맡지 않았다면, 마감 일을 했더라도 문을 조금만 더 일찍 닫았다면 제 생은 달라졌을까요. 하필 비가 오는 그 날, 당신이 쫄딱 젖은 채로 빵집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제 삶은 바뀔 수 있었을까요. 


   당신이 챙 모자를 벗고 고개 숙여 인사한 그 때, 저는 밀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제 삶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 그대는 26살, 저는 고작 14살이었죠.


   솔직히 말해, 기품 있는 당신이 보잘 것 없는 저에게 왜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갸름한 눈, 좁은 어깨, 봉긋 솟기 시작한 몸, 작은 손과 얇은 발목 때문이었나요. 그저 저에게 모델의 상(狀)을 보고 관심을 가졌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궁정 화가의 피를 이어 받은 그대는 이미 로마 안에서 가장 이름 있는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인상, 고상한 목소리가 있어 어딜 가도 환영 받았지요. 그대는 또 메디치가 추기경의 조카 딸과 아주 어릴 때 이미 약혼까지 마친, 어디 하나 빠질 구석 없는 인사였습니다. 저는 평범했습니다. 아버지가 제빵사인 덕에, 제 이름인 마르게리타 루티보다도 '라 포르나리나'(제빵사의 딸)로 불리는 게 훨씬 익숙했던 여성이었지요.


   당신은 우리가 맺어질 수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았나요?


   당신이 처음부터 나를 스쳐 보냈다면, 세상 물정 모른 소녀였던 저는 짧게나마 눈물을 글썽였을지언정 곧 일상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순박한 농민 혹은 상인 집안과 맺어진 후, 동전 두어 개만 떠내보낼 향긋한 빵 냄새를 몸에 품고 다녔겠지요. 누군가는 말하겠죠. 너도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을 뿐, 잘한 게 없다고.  


   변명 같겠지만, 저는 너무 순수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된 이후부터, 오직 사랑하는 이의 말을 있는 힘을 다해 믿고 싶은 여성일 뿐이었습니다. 그대는 그런 저를 풀어주지 않았지요. 나와 결혼하고 싶다, 약혼을 파기하겠으니 기다려달라….저는 당신의 이런 말을 줄곧 믿고, 줄에 묶인 동물처럼 맴돌았습니다. 


   당신은 그저 저를 소유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나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저는 드디어 오늘 프로포즈를 받을 것으로 기대를 품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철 없고 건방진,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꿨던 것입니다.   


   1518년, 우리가 알게 된 지 딱 10년째가 되던 해였습니다. 


   성숙해진 나를 온전히 그릴 수 있는 첫 화가가 되고 싶다, 누군가의 형상이 아닌 오롯한 마르게리타의 모습을 담고 싶다…. 당신이 한결 같은 다정함을 안고 제안했던, 그 말이 실현되는 그 날이었습니다.


   저는 마치 그 날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모델 일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대와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여지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귀부인이나 쓰는 화려한 터번을 올렸습니다. 옷을 벗고, 늘 그랬듯 쑥스럼 속 솔직한 제 모습을 열어줬습니다. 당신은 긴 시간 말 없이 있더니 제게 다가왔습니다. 왼손은 다리 사이, 오른손은 왼쪽 가슴을 스스로 가리려는 듯한 자세를 잡아주었지요. 당신은 그러면서 저를 몇차례 장난스레 간질였습니다. 나를 믿으라고. 그 어느 때보다 예쁘다고. 제겐 최선의 안정감을 줄 수 있던 말이었습니다.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정숙한 비너스). 미의 여신 비너스가 바다 위 거품 속에서 태어났을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저의 몸이 훤히 드러나는 초안을 보였습니다. 저는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제가 붓질 한 것 하나 없는데, 알 수 없게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는 제가 앉은 자리 뒤에 비너스를 뜻하는 은매화 나무, 세속적 사랑을 표현하는 모과 나무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제 왼손 약지에는 반지, 왼족 팔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글이 쓰인 리본을 그려 담았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달콤한 바닐라 빛으로 물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 문 앞에서 이 하늘을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 기다리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당신은 저를 봅니다. 저는 당신만을 바라봅니다. 쨍한 얼음 위로 내려앉는 봄비처럼, 우리 둘은 환하게 서로를 보듬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나와 결혼할 수 있겠느냐고…. 당신이 이 말만 해준다면, 저는 평생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모습이 담긴 그림을 든 그대는, 특유의 장난스런 미소만 띄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저는 아폴로의 저주를 받아 돌로 굳어버린 니오베의 아들과 딸처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한참 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몸 속에서 더 이상 물기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온 몸으로 흐느꼈습니다.


체사레 무시니, 라파엘로와 라포르나리나

   묻겠습니다.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아니, 그대에게 저는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저는 욕망과 동정의 대상일 뿐, 그 이상의 무언가는 아니었습니까. 그저 달콤한 말로 꾀어내기 쉬운 장난감에 불과했습니까.


   그대라는 열병은 참 지독하고 끈질겨서, 때로는 저주를 받은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 후 꼬박 4년을 더 만났습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약혼을 거듭 미룬다면서도, 결국 파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는 그 사이 로마 교황청의 모든 미술 분야를 감독하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교황이 추기경직 임명안까지 검토했다고요. 저는요. 이제 시들기를 준비하는 낡은 꽃이 됐습니다.


   그대는 저를 끊임없이 찾았지요. 저는 그럴 때마다 몸을 열어줬습니다. 사랑, 증오, 체념 등 감정 중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가장 크게 남은 감정이었던 데 따른 것입니다.


   1520년 3월의 어느 늦은 밤, 그대는 저를 끈질기게 탐했습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강한 스트레스를 떨쳐내려는 것처럼 격렬했었지요. 당신은 비틀거리면서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대는 의사가 탈진 원인을 물었을 때 왜 고작 열병이란 말을 했습니까. 


   전염병을 무서워하는 겁쟁이 의사가 왜 잘못된 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까.


   당신이 약에 취해 점점 더 몸이 약해지던 그때, 제가 하루도 빠짐 없이 편지를 썼다는 것을 모르시겠지요. 당신이 눈을 감던 4월, 제가 그 곁을 지켰다는 것 또한 모르시겠지요. 물론 미천한 몸이었던 데 따라, 바로 옆에 서진 못했습니다. 쫓겨난 채, 눈을 감고 귀를 연채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정부(情婦)를 둔 일을 신께 회개합니다.


   저는 그대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한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한참을 길바닥만 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만 솔직했던 걸까요. 아니, 반대로 나를 뺀 다른 모든 이에게만 솔직했던 걸까요.


   당신이 전해준 돈 따위 제겐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한 말에 따르면, 저는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화가의 생명을 앗아간 악녀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오직 믿고 사랑한 것밖에 없는데, 이게 그렇게 큰 죄가 될 지 몰랐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들, 저는 환영받지 못할 과부가 됐습니다. 오롯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나를 찾아와주세요.


   꿈이든, 현실이든, 환상이든 상관 없습니다.


   저를 대고 초상화를 그린 그 날, 당신은 어떤 마음이었느냐고. 저는 어떤 말도 들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내 귀에 대고, 당신의 진심만을 전해주세요.


   저는 지금 로마 트라스테베레의 산타폴로니아 수녀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맹세하건대, 저는 남들 못지 않게 평범히 살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곧 죽어 신을 만나게 된다면, 그는 가장 먼저 저를 '라 포르나리나'로 태어나게 한 일, 또 그렇게 해놓고는 내 삶에 라파엘로를 던져준 일을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라파엘로 산치오, 라 포르나리나

라파엘로 산치오의 초상

   라파엘로의 제자 로마노가 스승의 아틀리에를 찾은 것은 그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였습니다.


   그는 마르게리타가 담긴 그 그림을 알아보고는,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등 애정의 상징물을 모두 지워버립니다. 스승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따른 것입니다.


   라파엘로와 마르게리타의 사연이 담긴 그림이란 것은 2001년 이탈리아 복원 전문가들의 엑스레이 투시 작업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덧칠 아래 상징물이 모두 확인된 것입니다. 


   마르게리타는 수녀원이 들어간지 2년 후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기구한 삶은 지금도 미술사의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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