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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기억이 잊어지지가 않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두두의 마음 편지

by 아는 정신과 의사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정신건강의학과]


성폭력의 기억, 목을 조르는 등의 폭력, 성추행 등을 겪었습니다. 그 중 해결이 된 부분도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고 몇 년이 지나서 성인이 된 지금도 자책과 악몽에 시달려요. 왜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는지, 왜 더 강하게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는지, 더 나아가 왜 죽지 못하는지. 매일 생각해 왔습니다.

주변 사람에게 구하는 조언은 차마 제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혼자 문제를 파고들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자살시도에 실패하고 얼마 지난 뒤 다시 죽고싶어져 혼자 모은 돈으로 상담센터를 찾았습니다. 몇 개월 동안 상담선생님께 큰 위로와 헤쳐나갈 방법을 들었지만 저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선생님께서도 진척이 없다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상담도 그만 뒀습니다. 혼자 잊어보겠다고, 잘 살아보겠다고 하고 나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너무 힘듭니다.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잠을 못 자고 숨 쉬기가 어렵고 계속 제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상담선생님께 다시 연락하고 싶지만 혼자 해결하지 못했다는 쪽팔림과 다시 간다고 뭔가 더 나아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에요.


죽음으로 벗어나는 게 가장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두두의 마음편지)


안녕하세요. 이두형 정신과 원장 이두형입니다. 겪으신 일에 대해 어떤 말로 위로를 드릴 수 있을까요. 차라리 죽음을 택해서 라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또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겨내려, 살아오려 하신 그동안의 버거운 세월을 진심으로 위로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 는 죽음의 공포에 상응하는 두려움을 경험하였을 때, 그 경험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고 (재경험), 그것과 연관된 상황을 피하려고 하고 (회피), 이유를 알 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 가슴 두근거림과 호흡 곤란 같은 신체적 각성 상태(과각성) 이 유발되는 질환입니다. 교통사고, 전쟁과 같이 실제로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 뿐 아니라, 성폭력과 같이 심리적으로 죽음 이상의 공포를 유발하는 경험 역시 이러한 아픔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PTSD의 진단 기준 중 하나로 '부적절한 죄책감' 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커다란 참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에게는 '함께 죽었어야 하는데 나만 살아남았다' 라는 식의,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는 맞지 않는 죄책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러한 죄책감이 너무도 진심으로 받아 들여지는 증상입니다.


사연자 분의 사연을 읽으며 그러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당한 일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의를 해서는 안되는,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나 혼자의 힘으로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의지의 부족이자 나의 문제이다.' 와 같은 마음입니다.

사연자분이 경험하신 일들을 똑같이 경험하고도 한 점 힘든 마음 없이, 의연하고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기억들은 사연자분의 잘못이 아니었으며, 지금 사연자분께서 느끼시는 아픔들은 사연자분의 의지가 부족하시거나 마음이 약하셔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사연자분에게, '그토록 힘든 경험이 있었다면, 살아가면서 때로 아픈 마음이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는 관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상담을 받고 어떻게든 극복한 마음이 다시 '비정상' 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더라도 그 정도의 일이었으면 때로는 힘든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지도 모른다는 관점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토록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때로는 버티고 인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그리며 살아온 나 자신을 안아주면 어떨까요.


그동안 사연자분이 비정상적이라 생각했던 마음을 한 순간에, 내일부터 당장 없애고 지울 수 있는 면담이나 약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그런 건 없을 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아픔이 내 삶이 잘못되어서, 내가 비정상이라서가 아니라 그토록 힘들었던 경험의 흔적이라는 관점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다면, 그리고 '지금 여기' 에서의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너무 버거움이 많다면, 그 버거움을 함께 고민하고 들어드릴 방법은 많다는 이야기를 드립니다. '마음에 그런 아픔이 없는 상태' 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다시금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시는 것은 어떨지를 권해드립니다.

그 일은, 그리고 그로 인한 아픔은 사연자분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모쪼록 마음에 평온과 행복이 깃드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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