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에 지친 당신에게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본 글은 한국 전력 월간 KEPCO 기고글 입니다.)
어린 시절 고된 수험생활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버티게 한 원동력은 ‘~만 하면 행복해 지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대학에만 들어가면, 학교만 졸업하면, 취직하고 돈만 벌기 시작하면 된다.’ 세상을 처음 배우는 시기에 집과 학교에서 듣고 자란 이야기였다. 그 말 하나만 믿고 삶을 견뎌왔다.
그렇게 견디면 뭐가 된다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뭐라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행복도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라도 될 것이고, 되고 나면 행복해 질 거니까 그때서야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믿었다. 믿었다기 보다는 믿고 싶었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외에 이외에 삶의 다른 원칙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번듯한 직업을 구하는 것은 ~만 하면, 이라는 생각의 정점이었다. 명절이든 친구끼리의 모임에서든 더 이상 나의 삶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점에서 행복은 내게 가장 멀게 느껴졌다. 사회 초년생인 나는 여전히 가난했고, 외로웠고, 두려웠다. 이 정도의 나이와 이 정도의 성과면 충분히 행복해야 하는데, 평생 믿어왔던 원칙대로라면 그랬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막막하고 지겨웠다.
사실 대학을 합격하여 첫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를 갔을 때부터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전부일 리가 없겠구나. 그 자리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비로소 행복해졌다는 충만함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십 여년 이상의 고단한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막막함과 새로운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던져지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현실이 버거운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배부른 소리라 화를 낼 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이 그 때의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 만으로 행복하도록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져 있다면 참 편할 것 같다. 아마도 세상에 가득한 수많은 형태의 우울과 불안 중 대부분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긴다.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 것은 당장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주나, 그 안도감이 행복은 아니다. 예측할 수 없고 완벽할 수 없는 것이 삶이기에 불안과 걱정이 완전히 소실되는 일도 없거니와, 인간은 늘 생존의 해결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당연하겠지만, 우리에게 우리가 해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만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해내야 하는 일에 끝은 없다. 입시를 통과해야 하고, 대학을 가면 취직을 해야 하고, 직장을 구하면 재산을 모아야 하며, 불가능에 가깝지만 겨우 집 한 채라도 구하면 빚더미에 앉게 되고, 빚을 갚기도 벅찬데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식이다. 매너리즘은 ‘그것들을 충족시켜 나가는 것이 삶의 전부일까’ 라는 회의감에서 온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이 보기에는 무의미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여유다. 거창하게 회사를 나와 창업을 하거나, 욜로파이어족이 되어야 한다는 무리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24시간 동안 우리는 밥을 먹고, 씻고,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한다. 그 나머지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한 사람 몫의 삶을 고스란히 견뎌 낸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그 시간에 집을 취향껏 꾸미거나, 소중한 사람을 위한 요리를 준비하는 것, 꼭 가보고 싶은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거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해야하는 일들이 우리를 살게 해 준다면, 그 조그마한 여유는 우리가 그래서 사는구나 라는 의미를 준다.
하루 중 한 시간이라도, 단 십 분이라도 해야 하는 일들의 굴레에서 내려와, 나만이 아는 의미를 몰래 쌓아가는 시간이 우리를 숨 쉬게 한다. 똑같이 먹는 저녁이라도 나만 아는 맛집의 익숙한 자리에서 먹는 그 메뉴는 먹기 위해 먹는 식사와는 다르다. 직장 생활에 매진하기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우리에겐 시덥잖은 친구와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행복의 본질은 그 곁가지의 시간 들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삶의 전부일까? 라는 회의가 들 즈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신과를 공부하며 알게 되는 이 내용들을 나와, 진료실에서만 뵙는 환자분들과만 나누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했고 글솜씨는 없지만 늘 작가를 동경했다. 그게 전부였다. 타인들을 설득할 만한 동기나 비전은 없었다. 그냥 쓰고 싶었고, 왜 써? 라는 질문에는 그다지 할 말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로 부터 핀잔을 들었다. 그런 건 해서 뭐해?, 그래서 변화한 게 있어? 그게 왜 좋은 거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냉소는 냉정하고 또 합리적이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이유들은 그들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쓰고 싶으니까.’ 란 마음으로 글을 담아갔다. 이는 늘 설득력이 있는 일을 반복해왔던 내 삶에서는 작지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 시간 들이 쌓여 책이 되기도 하고, 글이 아니었다면 접할 수 없는 이들과 마주하는 즐거움이 되었지만 그것들을 바라고 기대하며 글을 썼던 건 아니다. 쓰는 과정은, 모두가 아는 의미를 추구하는 버거움과는 다른 충만함을 느끼는 과정이었다. 누구도 모를 의미 속에서 나만이 아는 기쁨을 피워내는 것, 내가 아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부합하는 순간들이었다. 삶에는 그런 순간들이 필요했다. 그래도 된다, 그러면 좋다고 알려줄 사람들이 없었을 뿐이다.
이제 나에게 그 정도의 선물은 줄 수 있지 않을까 란 마음으로, 당신의 삶에도 그 작은 기쁨이 시작되면 좋겠다. 누구도 설득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에게는 너무도 설득력이 있는 바로 그 사소한 일이다. 오랫동안 동경해 왔던 악기를 배우는 것도 좋고, 남몰래 느낀 감흥을 글로 남기는 것도 좋고, 여행을 떠난 주말 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여흥도 좋다. 조그마한 자취방 보증금을 준비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다면, 인테리어 어플을 통해 무리 되지 않는 선의 전구와 소품을 사서 방을 꾸미는 정도의 여유는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내 삶을 지켜주는 것은 내 작은 방이지만, 오늘의 고됨과 무료함을 위로하는 것은 거울 위를 비추는 2만원 짜리 팝아트 그림과 조명이다.
매일 같이 지나는 길에 목련이 피었다. 살짝 나뭇빛이 도는 흰 꽃잎이 정갈히 아름답다. 그 꽃을 바라보려면 1분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 1분의 딴청으로 삶이 위협받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1분이 있는 아침과 그렇지 않은 아침의 차이는 크다. 당신의 일상에,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여유로, 당신만이 알 수 있는 소중함이 삶에 깃들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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