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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Jul 12. 2022

네 눈이 내 삶의 이유가 되는 것

두 아이 아빠의 단상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결혼 전의 삶은 참 심플했다. 월급 혹은 노후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일을 버티고, 특별한 휴가 계획을 세우거나 아무런 의미도 중요도도 없는 고기 굽기 여행을 계획한다. 기다리던 주말이 되면 친구들과 싸구려 펜션에서 소맥에 취해서는 번개탄 그을음에 그슬린 고기 맛을 직화구이 맛이라며 떠든다. 가끔 사귀게 되는 연인의 설렘에 취해 몇 달을 지내다 이내 변하지 않는 건 가족과 친구들 뿐이라며 푸념한다. 견디기 짜증나고 또 공허하다가도 때로는 꽤 살만한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행복의 원리였다.

  그래서 결혼 전에는 아이를 왜 키우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애 보기 피곤하다고 당직을 바꿔달라고선 컴퓨터 상대로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그렇게 행복해하던 선배를 보면, 왜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세요 란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좀 더 이색적인 경험을 하고, 이국적인 여행지를 다녀오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면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자아실현 (= 좀 더 그럴듯한 일을 해보는 것) 에는 더 많은 노력이  쓰인다.

  육아는 내가 아는 모든 행복의 원칙에 위배되고 또 방해되었다. 년차당 1명이 있는 의국, 한 주에 이틀을 겨우 퇴근하는 상황인지라 당직은 정말 징역처럼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100분 토론이 재밌으려면 고된 시험기간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퇴근을 안하고 당직을 자청하면서 하는 스타가 재밌으려면 도대체 육아란 얼마나 고통스럽단 말인지, 상상이 어려웠다.

  하지만 한 아이를 키우고 또 두 번째 아이의 아빠가 되는 지금은 부모들이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길러왔는지를 알겠다.



  좋아하는 이의 눈을 바라볼 때 전해지는 뭉클함을 사랑이라 믿었다. 철이 없었다고는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확실히 지금보단 어렸던 그 때, 연인의 눈을 보는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그 찰나 만큼은 세상 어느 것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사실 서로가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의 행복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그에게 즐거움일 때는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그 눈맞춤은 더 이상 서로가 서로의 행복이 아니게 될 때 허무하게 끝이 난다.

  너는 나에게 충실한가, 진심인가, 너와 함께하는 것이 내 삶을 위하는 것인가, 타인과의 사랑이란 결국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냉정한 질문으로 늘 귀결되었다. 몇 번의 이별 이후에는 타인에 대한 설렘 자체에 대해서 공허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러한 형태의 행복은 평생 지속될 수 없는 것이란 직감 때문이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아이는 부모에게 어떠한 의무감이나 책임감도 없다. 가식이 없는 그 눈은 부모가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이 바라보고픈 대상을 향한다. 물론 부모의 마음은 늘 아이를 향한다. 아이가 나를 바라봐주며 웃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원없이 즐겁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이 본능적이고도 철저한 불공평이, 결코 끝나지 않는 행복의 샘이 된다.

  아이에 대한 마음은 누군가가 사려깊어서, 아름다워서, 돈이 많아서, 한 평생 의지가 될 것 같아서 드는 끌림과는 다르다. 철저히 아이에게 기준하고 아이를 위한다. 그 언제라도, 심지어 아이가 원치 않을 때라도 어떠한 조그만한 힘과 위로 그리고 의지와 격려가 되어주고 싶은 끝없는 마음이다. 아이는 이런 내 심정을 몰라 주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 네가 이런 마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아침마다 아이를 향하는 마음은 새로 피어난다. 예쁘게 깎인 머리가 이내 사랑스러운 더벅머리가 되는 기쁨이다. 장난을 걸어올 때의 달뜬 걸음과 목소리에서는 별빛이 내린다. 그 감동을 어떻게 아이에게 돌려줄 수 있을까, 무엇을 아이에게 해준들 그 벅참보다 더할까. 상대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줄 지, 내가 사랑하는 만큼 그도 나를 사랑해 줄지 라는 계산의 굴레에서 처음 벗어나보는 경험이다.

  아이는 태어나 주었고, 생명의 근원인 햇살처럼 웃어주고 있다. 아마 평생을 다하여도 이미 아이가 내게 선사한 것들을 돌려주지는 못하겠지.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 그 무엇보다 나를 위하는 것이 되는 충만함이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한적한 시골에서 주 4-5일 가량을 일하는 월급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보상도 나 라는 한 사람의 행복을 지탱하기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과분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출출할 땐 국밥을 먹고, 낚시를 배워 회를 즐기고, 주말이면 번개탄 숯불구이를 해먹거나 때로는 새로운 인연에 설레는, 충분히 만족스런 삶이었을 게다.

  그래서 예전의 나는 24시간을 25시간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시건방지게도 그들을 평가하고 또 절하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끝날 삶인데 이 멋지고 따뜻한 것들을 뒤로한 채 무엇을 위해 저렇게 달려가는 것일까, 라고

  이제는 알 것 같다. 아이가 배우고 싶은 걸 가르쳐 주고 싶고 휴일을 윤택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그렇게 한량이던 나를 주 6.5일도 기꺼이 일하게 한다. 작은 병원을 홀로 꾸려나가며 아무리 험한 대우를 받아도 바탕화면에 화질구지로 저장해둔 [아이가 달려오는 모습. gif] 하나면 다 괜찮다. 네가 웃는다면 다 괜찮고, 너를 위할 수 있다면 기꺼이 괜찮지 않음을 감수할 것이다. 내가 평가절하했던 이들의 가족이, 학문이, 업적이, 사랑이 지금 내 아이만큼 그들에게 소중했다면,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면 이제는 십분 그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




  사고가 나서 한 사람만 살아야 한다면 아이를 살릴 거라고 했던 친한 형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때의 내가 아는 세상에는 그런 마음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술자리에 어울리는 화려한 미사어구일 뿐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 표현을 다르게 느낀다. 그 진솔한 말이야 말로 구질하고 지리한 이런 글보다 훨씬 더 간결하게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을 잘 표현하였던 말임을.

  총각 때는, 솔직히 말하면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다. 나를 찾는 이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싶다는 것은 직업적인 의식과 자아 실현, 자기 만족에 가까웠다. 다들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갈 뿐인 이들이 모이고 고인 것이 세상이라는 의식이었다.

  이 역시 이제는 완전히 다르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따뜻하면 좋겠다. 네가 살아갈 이곳에,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원리를 가지고 사는 이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첫째 때 처럼 둘째 아이의 이름으로 작은 기부를 해야겠다.






삶의 원리를 바꾸어준 너희들, 사는 즐거움이 아닌 삶이 고된 의미를 처음 알려준 웬수같은 보석들. 부모와 아이로 인연이 닿아 주어, 아득히 고마워.





P.S.
  사랑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면 쉽게 고백은 하였으되 과거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보다 앞선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삶에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내게 선사해 주고, 함께 일구어 나가며 늙어가는 유일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바라보는 느낌이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이전의 삶에서 사랑이라고 믿었던 어떤 감정들보다도 더 아내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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