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 걸까, 사는 것이 힘에 부칠 때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고민이다. 이렇게 고달픈 삶을 왜 끝내지 않고 견뎌야 하나. 그 의문은 당연히도 삶을 견디고 있을때 찾아온다. 우리는 사는 것이 기쁠 때는 삶이 어째서 행복인지를 분석하지는 않는다. 그런 순간들에는 그저 감사하며 주어지는 일상에 몰입해버리고 말 뿐이다. 반면 인생이 고달플 때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생각의 굴 속으로 웅크러든다. 짓눌러오는 인생의 무게가 숨막혀 그 무게를 버텨야 할 이유라도 찾지만, 그만한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하루의 소소한 위안 따위는 이 버거움에 비하면 너무 하찮다. 작은 소중함들은 모두 미뤄둔 채 우리는 답을 내릴 수 없는 고민들 속을 부유한다.
잠결에 나를 찾다 등 뒤를 포근히 감싸오는 아기손의 온기, 일로 몇 달을 고향을 떠나 있다 새벽녘 ktx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택시를 타서 도착한 친구의 국밥집에서 국밥 한 술 뜰 때의 감동. 그런 것들의 느낌을 말이나 글로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상쾌하다, 시원하다 따위의 단어로 몇 년을 떠나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의 몸을 고스란히 품어주었던 그리운 바다 앞에 다시 섰을 때의 느낌을 감히 표현할 수 있을까. 고작 그 정도의 언어들로 삶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초라한 일이다. 인간의 생각과 말이란 참으로 빈약하여 삶의 의미가 될 만한 짙은 감정들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살아가는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 빛을 잃는다.
그런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고통이 지나치면 인간은, 알량한 단어들의 나열로 그 고됨의 이유를 설명하려 든다. 삶이 선사하는 느낌 자체들을 뒤로 한 채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빈약함들에 집착한다. 삶의 고통을 마주하고, 그 고통을 견딜 논리를 찾고, 그 논리의 허술함에 다시 절망하는 악순환이다.
문제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힘들때마다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를 찾겠다며 일상에서 벗어나 빈약한 언어적 틀로 회귀해버리는 우리의 습관에 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뼈아픈 인생의 무게에 비해 생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소소한 것들, 지금의 나 자신과 미래를 위해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시도들은 하찮기 짝이 없게 여겨진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그딴 것들이 무슨 소용이야.' 라는 말 속에 우리를 살게하는 것들은 매몰되어 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시시각각 우리에게 쏟아지는 진짜 의미들로부터 멀어져, 어떠한 기쁨도 생기도 주지 않는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이라는 감옥에 갇힌다.
우리는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로서 완벽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건강, 대인관계, 트라우마, 경제적인 어려움.. 마음의 평온을 위협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이는 얼마나 내가 잘못 살아왔는지 혹은 삶이 내게 얼마나 가혹했는지와는 무관하다. 정도에 차이는 있겠으나 인생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보편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위협을 '불편하지만 존재할 수 있는 것' 으로 간주하지 않고 '존재하면 안되는 이질적이고 비정상적인 것' 이라 간주한다. 마음이란 평온하고 부드러운 상태인 것이 정상이며,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슬픈 등의 불편한 느낌을 느끼는 것은 상당히 정상을 벗어난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이러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시도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따른다. 1. 인생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 내게 어떤 문제가 있는 지를 분석하고, 2. 그 원인을 알아내려 하며, 3. 그 원인을 해결하고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힘든 마음을 제거하려 한다.
그런데 마음이 지치고 힘든 상태이므로 그 시도는 주로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실제로 의미있는 일을 하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지를 끊임없이 사고하는 것이다. 나는 왜 힘든 것일까, 무엇이 문제고 문제의 원인일까, 이렇게 힘든 삶을 이어갈 이유는 무엇일까. 잠깐의 고민으로 해결책이 나올 어려움들이었다면 애초에 나를 그렇게까지 괴롭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답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막막함만이 쌓인다.
더욱 비극은, 그러한 생각에 몰입하느라 '인생에 어떤 힘든 것들이 존재하는지' 만을 지속적으로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너무도 깊이 체감되는 심리적 고통에 비하면, 떠올릴 수 있는 기쁨들이란 너무도 미미하고 무의미해보인다. 사랑하는 사람, 나만의 꿈, 생기와 활력을 줄 소소한 감동 같은 것들 따위는 사치라는 냉소만이 마음에 가득찬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염세를 더하는 악순환이다. 그렇게 우리는 편안해지기 위해 생각을 시작하고, 그 생각 속에서 더욱 불편해지기를 반복한다.
어떤 신, 절대자가 존재하여 우리네 삶의 의미를 미리 정해놓았다고 하자.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정해놓은 인생의 의미가 있다면, 나는 그것이 그 어떤 저주보다도 끔찍하게 느껴진다.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든 누구를 만나고 어떠한 일을 하든, 그것들의 의미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미리 규정되고 고정되어 있다니.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스스로 떠올린 소중함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설계를 무작정 따르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역설적으로 그보다 더 무의미한 것도 없을 것이다.
정해진 삶의 의미 따윈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자유롭다. 이는 사는 무게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고통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떠올리며 살아갈지를 택할 수 있다는 자유다. 무엇을 지향하며 보내는 하루가 나를 충만하게 하며, 살아있다는 느낌을 전해주는가, 그것이 살아가는 의미이다. 이는 당연히 모든 사람마다 다르며, 또 모든 생의 순간 마다 다르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 의미는 놀이공원에서 커피컵 핸들을 돌릴 때 자지러지듯 웃는 아이의 얼굴에 있다. 몇 달, 몇 년 만에 겨우 다시만난 친구가 예전과 똑같이 반가울 때에도 있고, 유튜브로 서툴게 따라한 요리가 의외의 맛을 낼 때에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가장 대단한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무가치한 것들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할 수 있다. 고정된 사는 의미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에게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무한한 의미를 그때의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한다.
그래서 내게는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다는, 그 의문이 지금 마음에 왜 떠오르는 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추구하는 과정이 미처 몰랐던 삶의 진리를 깨치게 해주고 살아가는 힘을 주는지, 혹은 인생에 대한 회의감과 허무함을 더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마음의 기력을 잃게 하는 지를 생각할 것이다. 마음에 찾아오는 질문에 대하여 무턱대로 답을 찾기 보다는, 그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을 내리는 과정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나의 삶을 '실효적'으로 나아지게 하는 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만약에 내게도 그러한 질문이 드는 버거운 시기가 찾아온다면, 이전에도 늘 그랬듯 바다를 찾을 것이다. 8시간을 내리 같은 자리에서 해가 지는 바다의 하루를 고스란히 바라본 적이 있으신지. '바다, 푸른 파도, 해수욕장, 시원함' 따위의 단어들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우주가 매 파도마다 나고 진다. 이어폰을 꽂고 인생 음악을 bgm으로 두고 바라봐도 좋지만 사실 파도 소리 자체가 어떤 음악도 따라오지 못하는 선율이다. 하늘에 떠 있는 해의 위치에 따라 파도의 색도, 그것을 배경으로 두는 하늘의 빛도 표현할 수 없이 오묘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그저 바라보고 싶다. 2000원을 주고 사 트렁크에 던져놓았던 은박지 돗자리를 모래사장에 깔고 누워 바다처럼 펼쳐진 하늘도 보고 싶다. 이는 '생각 속의 삶' 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의미있는 감정들을 전해준다.
누군가가 내게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이런 것들이라 억지로 답하겠으나, 이미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들이 주는 생기는 이런 글로는 전달할 수는 없다. 나를 살게 하는 그 느낌들은 어차피 말로는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지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 하루들에 몰입할 수만 있다면.
내일도 24시간이 주어진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잠도 자고, 먹기도 하고, 씻기도 할 것이다. 인생은 그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에 대한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과 한정된 마음의 기력을 나는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에 소진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사랑하는 아이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가거나 진료실을 정돈하거나 할 것이다.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실제로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삶에 정해진 의미 따위는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이 나를 무한히 자유롭게 한다. 다행히도 버텨야할 이유도 추구해야 할 의미도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원하는 하루를 늘 새로 떠올리고 또 보낼 수 있다. 이 사실이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아마 많이 지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친 당신에게는 어떤 하루가 가장 좋을까. 당신은 어떤 일상에서 가장 위로받는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떠한 마음 상태이든 그것들을 자유로이 고민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의미다.
말로써 당신을 설득할 자신은 없다. 단지 바랄 뿐이다. 당신이 답을 찾을 수 없는 생각의 늪에 갇히지 않기를, 그리고 그 대신,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사랑할 만한 것들에 실제로 접촉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