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외모가 둔하고 문제가 많으니 남한테 더 잘해야 한다.' 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이가 진료실을 방문했다. 어린 시절부터 쭉 들어온 그 말은 그를 그 말 속에 가두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다고 인식했고, 그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이어트를 하고, 웃는 모습을 유지하고, 불편한 상황에서도 늘 꾹 참기만 했다. 이러한 원칙으로는 더 이상 삶이 이어지지 않겠구나 란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해 졌을 때 그는 병원을 찾았다. 꾸준히 면담을 이어가며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는 자라면서 들어온 부정적인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외모든 성격이든 인간관계든 문제 투성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어떤 면에서 A씨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태어나서 한번도 인정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요. 사람을 만나면 걱정부터 들고. 아버지도 늘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너를 보고만 있으면 답답하고 걱정이 된다, 앞가림을 잘 해야 하는데 한번도 네가 좋게 보인 적이 없다, 남한테 적어도 피해를 주지는 마라.' 무언가 저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거겠죠."
"아버지의 삶을 동경하시나요?"
"전혀 아니에요. 아버지로도, 개인으로도 뭐 하나 배울만한 것, 멋진 것 없는 그런 삶이에요."
"그 분의 가치관은요?"
"늘 비관적이고, 다른 사람들 에게는 엄격하지만 자기 자신의 단점은 못보시고.. "
"네 좋습니다. 삶이든 가치관이든, 닮고 싶지도 배우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이야기를 보통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음.. 그다지 경청하지 않거나 오히려 피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는 면담을 할 때면 A 씨 께서, 면담에서 나누는 저와의 이야기 보다는 그동안 A 씨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의 '말' 을 더욱 굳게 믿는다는 느낌, 심지어 그 아버지의 관점에서 제 이야기를 반박하려는 느낌을 받는답니다."
지금 당신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말을 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너무도 따르고 싶은 멘토인가, 사랑하는 사람인가, 평생 함께하고 싶은 친구인가. 아마도 그보다는 실망을 주었던 스승, 이별의 아픔을 가르쳐준 전 연인, 결코 변하지 않을거라 믿었던 이도 변할 수 있음을 알게 한 친구 등 일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기억하고 싶을까. 늘 마음속에서 그들을 되새기며 살고 싶을까. 아마 반대일 것이다. 그들을 잊고 싶을 것이고, 그들이 마음과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최소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메어지는 말들을 마음속에 담고 산다. 그 사람을 닮고 싶지 않고 그의 가치관에 찬동하지도 않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그러한 그들의 말을 곱씹게 되는 아이러니다.
그 아이러니의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야기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감이 넘치고 삶이 잘 풀려간다고 느낄 때는 희망과 열정을 이야기하는 글에 벅참을 느낀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도 버겁고 힘든 인생의 시기를 보내는 이에게는, 사는게 잘 풀린 이들의 배부른 소리로 느껴진다. 따돌림과 소외에 지친 학생에게 대인관계가 얼마나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지를 이야기하는 글이 와 닿을까. 마음이 힘들때 우리는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이야기와 논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우리는 타인의 말이 얼마나 삶에 이로운지, 혹은 얼마나 그 사람을 닮고 싶은 지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기존의 나의 생각, 지금의 내 마음 상태와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함정이다. 긍정적인 마음의 그릇에는 희망이, 부정적인 마음의 그릇에는 냉소가 담긴다. 마음이 고단할 수록 아픔을 남긴 말과 이야기에 빠져든다.
'내 마음과 가까운 이야기에 마음이 기우는' 원리에 따라 우리는, 마음이 힘들때면 우리는 나를 비난하고 폄훼하는 이야기들에 빠져든다. 그리고 보통 그런 말과 이야기들은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전해진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록, 그가 쓴 글을 열심히 읽을 수록 우리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상처가 되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둘 수록 우리는, 결코 닮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의 모습을 닮아가는 슬픈 고리에 빠지곤 한다.
나는 글을 읽거나 타인의 말을 들을 때 그 이야기가 얼마나 그럴듯한 지, 또는 얼마나 마음을 잡아끄는지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타인의 말과 글이 나를 끌어당긴다는 것은 그 내용이 유려하여서도 있지만, 단지 그 내용이 지금의 내 마음을 잘 대변하여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 속에 담긴 논리와 통찰이 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지를 생각한다.
자극적이고 맛있지만 건강에는 나쁜 음식처럼, 아무리 매력적이고 구미가 당기는 논리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많다. 반대로 샐러드나 닭가슴살 처럼 처음에 듣기엔 어색하거나 낯설더라도, 그 이야기가 삶과 행복의 밑거름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전자 처럼 어떤 말과 글이 얼마나 맛있는 지의 기준보다는, 후자 처럼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를 기준으로 그 메시지를 나의 그릇에 담을 지를 결정한다.
무조건적으로 스스로와 미래를 긍정해주거나 낙관시키는 말만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덮어놓은 긍정의 말 (개인적으로 무조건 잘 될 것이다 라는 무조건적인 낙관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완벽히 원하는대로만 이뤄질 수 없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들은 오히려 개인의 객관적인 성장을 저해하여 결론적으로 스스로의 행복을 쌓아가는 데 방해가 될 지도 모른다.
글이 편안한 지 불편한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신랄한지 부드러운지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가 삶에 미치는 영향, 기능이다. 그 내용이 나와 삶을 비관하고 냉소하게 만드는가? 혹은 그동안 막힌 속을 후련하게 해 주거나 미쳐 내가 몰랐던 통찰을 제공함으로써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가? 그 기준에 따라 나는 '본능적으로 끌리는 말과 글' 대신 '삶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어갈 힘을 주는 말과 글' 을 가까이 하려 한다.
당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권해보고 싶다. 너무도 싫고 상처가 되었던 그 사람의 말과 글이 당연히 늘 정답일 수도, 정답일 리도 없다. 당신이 그러한 상처를 남긴 이를 닮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단호히 그가 남긴 말도 거절하여 보자. 아픔을 남긴 말과 글에 빠져들지 않는 것은 '나는 당신을 닮고 싶지 않고, 당신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아.' 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한 관점이 이어진다면, 그들이 남긴 이야기로 인한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 갈 지도 모른다.
당신과 당신의 삶을 폄하하는 말이 가깝게 느껴진다면 이는 당신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단지 당신의 마음이 지쳐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을 아프게 파고드는 그 말들이 얼마나 맞는 말인지를 따지기 보다는, 그 말들이 실제로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솔깃하지만 삶을 혐오하게 하는 이야기들 보다는, 당장 와 닿진 않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을 믿게 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이끌린다고 하여 진실은 아니다. 나는 어떤 말이 당신에게 가장 잘 와닿는지 보다, 어떤 말이 당신이 오늘을 살게 하는 지에 관심이 있다.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말, 도저히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메시지를 당신에게 남긴 사람을 당신은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가 남긴 그 말들을 사랑하는것도 더 이상은 그만 두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