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리, 그래도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
전혀 특별하지 않은 어느 날의 시골 피아노 학원 풍경
도시를 떠나 시골로 왔다. 그간 하나라도 더 쥐고 채우느라 참 바쁘게도 살았다. 하루를 보내는 체감 속도가 빠를수록 사람의 온기도 바삐 스쳐 갔다. 그 삭막함에 질린 참이었다. 사십 분 동안 버스를 기다리고, 커피를 사러 왕복 두 시간을 다니다 보면 절로 마음이 느려진다. 각박하게 나를 몰아세운 삶의 눈치도 조금 느슨해진다.
오래도록 내려놓은 피아노를 다시 치기로 했다. 길 가에 건물 보다는 여백이 많은 마을.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을 징검다리 삼아 걷다 보면 피아노 소리가 한 걸음씩 커진다. 주택이었던 2층 건물의 거실 자리를 고쳐 만든 학원을 들어선다. 여러 목소리의 “안녕하세요.” 가 들려온다. 어른이 왔다는 이유만으로 배꼽 인사를 하는 아이들이 요즘 세상에도 있다. 오래된 형광등의 어스름한 불빛 같은 난롯불이 시골집 아궁이처럼 방을 데운다.
한 두 곡 연습하다 보면, 오늘 몫의 피아노를 다 친 아이들은 학교 숙제 까지 끝내고서 하나둘 사라진다. 차를 타고 삼십 분은 가야하는 집에 사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아이들도 선생님 차에 오른다. 이제 다닌 지 세 달 남짓이지만 선생님은 내게 학원을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돌아오는 기척을 아까 느꼈지만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내 건반 소리가 마음에 드는 날. 한 곡만 더, 한 번만 더 하다 아차, 나 하나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는 선생님께 죄송했다. 서둘러 일어나려는 찰라 선생님이 문을 두드리더니 과자와 따뜻한 믹스 커피 한잔을 그릇에 고이 담아 주신다. 잔 비우는 핑계로 한 곡만 더 치고 겉옷을 챙겨 든다.
학원에 왔을 즈음 소파에 엎드려 색연필을 끄적이던 세 살배기 꼬마가 그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다. 선생님이 한마디 하신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학원을 그대로 했었거든요. 애기가 뱃속에서 피아노 소리를 많이 들어 그런지, 다른 소리에는 민감한데 피아노 소리는 유독 편안해하고 들으면서 잠도 잘 자요. "
한 손에 노랑 색연필, 머리맡에는 졸음에 흐려진 선이 가득한 스케치북, 엄마 뱃속인 양 엄마가 덮어 준 담요 아래서 잠든 아이. 해 지듯 잠든 그 표정이 자꾸만 떠오른다. 바쁜 삶에 치인 상처도 잠들어간다. 그래도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다.
(본 글은 좋은생각 2019년 6월호에 수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