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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깊은 마음 속으로 밀어놓은 아픔이 마음에게 주는 영향. 두두의 마음 편지

by 아는 정신과 의사



이혼 소송중입니다. 2년 정도의 시간을 쌍둥이를 홀로 키우면서 일하는 워킹맘 입니다.


남편의 배신과 인성의 끝을 본 이후 마음을 잡기 힘듭니다. 육체의 고난으로 정신의 피폐함을 더 이상 감당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왔습니다.


증상은 잘 모르겠지만 정신과에서 처방 받은 약물을 복용하고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두려움에 복용을 중지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너무나 기력이 딸려서 당췌 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한약을 먹고 그나마 기력을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 해야겠다 등등... 맘은 먹지만 일 외에는 집밖에 나가질 않습니다. 또한 책을 읽어도 눈에 글씨가 들어오지 않아서 무엇을 읽었는지 다시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집중력 제로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누구를 만나는 것도 귀찮고 먹고 살아야 하니 일은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힘에 부칩니다. 이런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두두의 마음 편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두형 입니다.


생계를 직접 꾸리시면서 쌍둥이 아이를 홀로 키우신다는 사연자님의 고단함을 어떻게 함부로 헤아릴 수 있을까요. 저 역시 어린아이를 양육하고 있어, 사연자분이 감당하셔야 할 어려움이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사연자분의 지금 마음은 힘든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슬플 일에 슬퍼하거나, 혹은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때로 울적한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현상입니다. 다만 우울에는 심리적인 현상과 신경생리학적 현상이 복합적으로 얽어있습니다. 지나친 슬픔이 지속되다 보면 뇌의 생리현상에도 영향을 주어 생리적인 우울함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만성적인 공허감, 우울감, 무기력, 무의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어쩌면 사연자분께서 ‘충분히 슬퍼할 만한 시간’ 을 가지지 못하셨던 것은 아닌 지 생각해 봅니다. 세상 어느 누구라도, 사연과 같은 일들을 경험한다면 많은 어려움, 답답함,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연자분께서는 마음 놓고 힘들어 하거나 슬퍼하지 못하셨을 것 같다 라, 감히 넘겨서 짐작을 해 봅니다.


만약 그러셨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아이들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부모가 되고서야 처음으로 내 삶보다 소중한 것이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마도 사연자 분 역시 같은 마음이 아니셨을까, 아무리 힘들고 버거워도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 마음을 독려하여 하루하루에 충실해 오셨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럴 때, 마음껏 슬퍼하는 것조차 사치인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지금 당장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우리가 인식하고 느끼지 못하는 아주 깊은 공간속에 숨겨둡니다. 처음에는 잘 티가 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렇게 깊이 숨겨져 있는 슬픔은 나의 마음을 점차 지치게 합니다. 이유 없이 몸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무기력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사연자 분께 ‘무리해서 괜찮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책이 잘 읽히지 않으면 읽지 않아도 되고, 너무 무리해서 생산적인 일을 하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것도 하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버거워하는 것은 참 불편한 일이지만, 불편하다고 해서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꿋꿋이 일상을 이어오신 것 자체가 대단하다 느껴질 만큼, 사연자분의 마음이 힘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지금의 사연자분의 마음은 하루 빨리 고쳐야 하는 괜찮지 않은 상태,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불편한 상태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괜찮음의 상태로 돌아가려 무리해 노력하시기보다, 그저 지금 꼭 필요한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시는 일상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다시 보시는 것을 조심스레 권유 드립니다. 꼭 약을 드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마 그동안은 직장에서도, 또 가정에서도 책임감으로 인해 이러한 슬픔들과 마주하기 힘드실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면담은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을 지도 모르는 슬픔을 조금씩 풀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르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깊은 마음 속 이야기들을 꺼내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공간에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혹은 애써 외면하던 해묵은 슬픔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다 보면 그동안 내가 붙잡으려 노력했던 ‘괜찮음’ 도 자연스레 마음에 자리 잡을 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사연자분의 앞날에 괜찮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고단함 대신, 그저 소소한 평안함이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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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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