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밤

by 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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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사람들은 새해를 축하했고, 거리에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카페 창문마다 ‘해피 뉴이어’ 스티커가 사방에 널려있고, 누군가는 새 다이어리를 펼치며 올해의 목표를 적어 내렸다. 하지만 그날은 늘 그렇듯 신춘문예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올해도 결과는 같았다.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다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한참을 스크롤해도 낯선 이름들뿐이었다. 한때는 그 명단에 내 이름이 한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믿었다. 그때는 내 글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언어라고 자신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세상이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만 새해라서 항상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모두의 순간에 나는 멈춰야 했다.


다섯 평 남짓한 방은 춥고, 벽지는 한 해를 더 버티지 못한 듯 벌어졌다. 낡은 난로가 간헐적으로 철컥거렸고, 천장의 형광등은 미세하게 깜박였다. 책상 위에는 반년 전 원고가 놓여 있었다. <최종의 최종>이라고 적힌 파일 이름이, 이제는 조롱 같았다. 저녁 무렵에 사 온 소주 한 병을 꺼냈다. 마트에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걸 피해 일부러 구석 진열대에서 집어 들었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이런 날에는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는 게 더 어울렸다. 병째로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이 뜨거웠고, 가슴이 서늘했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오랜만에 마신지라 목구멍에 걸려서 세차게 기침을 몇 번 하고 알코올이 몸을 적시는 속도만큼 생각을 더뎌졌다. 창밖을 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시끌시끌했다. 누군가는 새해의 첫날을 사랑과 희망으로 채우고, 누군가는 “이제부터 제대로 살아야지”라고 다짐하고 있었을 텐데, 나는 올해도 똑같은 자리에서 같은 문장을 고치고 있다.


꿈이 뭐였더라.


소리 내어 말하니, 그 말이 방 안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그게 농담인지, 고백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벽 한쪽에 붙은 달력이 작년 날짜로 멈춰 있었다. 1월 1일이라고 적힌 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시간이 새해로 넘어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낡은 전기난로 위에서 철판이 팽창하며 ‘짹’하고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방 안의 유일한 생명이었다.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몰려들며, 멀리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예전에 밤새워 원고를 처음으로 완성한 날, 아니지 처음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초안을 완료한 어느 겨울이 생각났다. 언젠가 내 문장이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 있을 거라던 믿음이 허황돼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진심이었다. 지금은, 글보다 생계가 더 진실하다. 다시 병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켰다. 혀끝이 마비되는 느낌과 함께, 몸이 무거워졌다. 천장에 비친 형광등이 흐릿하게 번졌다. 병을 내려놓고 누웠다. 낙선의 씁쓸함과 소주의 열기가 한데 섞인 채,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인지,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끝나가는 소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1


세상은 흰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평원, 눈보라가 아닌 듯, 안개가 아닌 듯, 모든 것이 부드럽게 흐트러진 풍경 속에 앉았다. 낯익은 종이가 닿았다. 누렇게 빛이 바랜 원고지 한 장, 거기에는 내가 썼던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가 오래전에 써놓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인간은 이해하려고 쓰는 존재다.


글씨는 카뮈의 필체처럼 단정했고, 문장은 생텍쥐페리처럼 맑았다. 따라 읽는데 한낱 문장이라기보다, 하나의 기도 같았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한 권의 미완성 원고를 고쳐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유명한 작가의 말이 마음에 도달했다. 그런 문장들은 어느 소설 속 인물들이 남긴 대사처럼 몽환적이었다. 멀리, 촛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따뜻한 등이 켜진 낡은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펜 하나와 원고지가 놓여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 펜을 들고, 종이 위에 한 문장을 적었다.


이건 내가 다시 쓰는 첫 문장이다.


펜촉이 종이를 스칠 때, 바람이 멎었다. 시간이 멈췄고, 그때 멀리서 누군가 걸어왔다. 하얀 코트를 입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왜 멈췄나요?


그의 목소리는 어린 왕자의 문장에서 흘러나온 듯 따뜻했지만 대답은 하지 못했다. 대신 손끝으로 원고의 모서리를 만졌다.


당신은 세상을 바꾸려고 글을 썼죠. 하지만 세상은 당신이 쓴 문장보다 훨씬 느리고, 훨씬 잔인했어요. 그래서 멈춘 거죠. 하지만... 글은 세상을 바꾸지 않아도, 당신을 바꿉니다.


모든 말이 공기 중에 머물렀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온화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나직한 연민이 깃들었다. 내 문장은 세상에 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도 내 문장에 닿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일어나 책상 위의 펜을 들며 중얼거렸다. 계속 써야 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더라도, 그 문장 하나가 나를 살게 만들 테니까. 그가 뒤돌아 걸어갔다.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저 공기 속에 신기루처럼 퍼졌다. 다시 펜을 들었고 묵묵히 한 문장을 썼다.


아직, 쓰고 싶다.


그 순간, 달빛이 흘러내렸다. 종이 위로 달의 빛이 번졌고, 문장이 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한 겹의 꿈이 벗겨지듯, 공기마저 빛으로 변해갔다. 바람이 불었다. 종이들이 흩날렸다. 수많은 문장들이 하늘로 올라가, 별처럼 반짝였다. 그건 마치 모든 글이 결국 하나의 하늘로 모이는 광경이었다.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이건, 다시 꾸는 꿈이다.



2


눈을 떴을 때, 사물들의 윤곽을 서서히 찾아야만 했다. 방금 전까지의 꿈은 쥐고 있던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간 것과 같았다. 얼굴은 젖었다. 바다 밑에서 오래 숨을 참고 있던 사람이 수면 위로 올라와 첫 숨을 내쉬는 순간처럼, 마음이 먼저 울고 있었다. 천장은 낮았고, 공기는 푸석했다. 현실이 돌아오지 않아 몽롱해진 사이에서도 꿈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말로 형용되지 않은 기억이 이 방안을, 아직 꺼지지 않은 문장의 그림자가 되어 떠돌았다.


겨우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노트는 어제 그대로였다. 페이지 한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볼펜을 쥔 손끝이 떨렸다. 단 한 문장이라도 써보려 펜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펜은 종이에 다가가지 못했다. 잉크는 멈춰 있었고, 종이는 그저 흰색이었다. 꿈의 빛이 아직도 어른거렸지만, 내가 처한 현실은 잔인해서 종이 위로 번지기에는 힘겨워 보였다.


결국 펜을 내려놓고 노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하얀 면이 텅 비워진 폐허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아무 심정도 옮기지 못한 종이에는 묘하게도 침묵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꿈을 다시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발악을 한 뒤에도 결국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게, 아주 작게 등을 켜놓고 간 것처럼 손짓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 등불이 실제로 있는지, 아니면 마음속에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바람에 나부끼는 촛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아무 문장도 쓰이지 못한 노트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머릿속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3


한참을 멍하니 폐허를 산책했다. 노트에 손끝을 올려놓았다. 종이는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그 빈칸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어떤 가능성이 돌아누우며 깨어나고 있었다.


쓰지 못하는 날에도, 너는 이미 쓰고 있다.


문법도 맞지 않고 감동도 없는 이상한 말인데 내게는 필요한 위안이었다. 굳어 있었던 볼펜이 이 문장 한 줄에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잉크가 흐르진 않았지만, 펜촉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글자들이 이동했다. 세상 모든 이야기의 첫 숨 같은, 아직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절반쯤은 시작된 상태. 종이에게 말을 걸었다.


몇 번을 펜을 들었다 내렸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태초의 움직임이 어딘가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스치던 그때, 바람인지 마음의 기억인지 또는 꿈에서 흘러나온 사라지지 않는 그 기척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 안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틈을 통해, 또 다른 이름 없는 문장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동안 숨을 쉬는 것도 잊게 되었다. 그저 잉크가 번지지 않은 하얀 면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내게로 걸어오던, 출처 없는 단어의 조합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낯선 듯 익숙한 획이 종이를 가르며 머리를 긁는 소리를 냈다.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새벽의 첫울음이었다.


오늘도 쓰지 못한 문장들에 둘러싸여 있다.


종이는 방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어 있는 면에 망설임 없이 나를 통과했다. 잠겨있던 방의 자물쇠를 열쇠로 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손이 움직였다. 단어를 찾지 않았다. 이 방의 어둠 뒤편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생명체들처럼, 하나씩, 또 하나씩, 스스로 형태를 갖춰 종이 위로 기어 나왔다. 잊고 지낸 꿈의 언덕을 걸었다. 그 언덕에는 무한한 미로들이 있었다. 펜촉이 쉴 틈이 없어졌다. 노트에서 시선조차 떼기 어려웠다. 문장이 흘러넘쳤다. 어떤 문장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속도로 다가왔고 어떤 문장은 스스로 이어지며 다음 이야기를 끌어냈다. 그것들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문장을 쓰고 있는 건지 문장이 나를 쓰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종이 위에서 문장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고, 마침내 한 줄기 흐름이 되어 이어졌다. 기쁨이라 부르기에는 조심스러웠고, 슬픔이라 하기에는 다정했다. 이름 없는 문장 하나가 문을 열어준 뒤, 수많은 문장들이 그 뒤를 따랐다. 기다렸던 감각이 선명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오늘은, 적어도 오늘 만큼은 다시 쓰기 시작한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4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된 일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어떤 겨울 저녁에 엄마의 손에 이끌렸던 서점에서 표지가 예쁜 책이 내 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였다. 주변이 들리지 않고 오롯이 한곳에 집중해 책장을 넘기자마자 불쑥 흘러나오던 미묘한 기운이 마음의 문을 열어줬다. 그 문 너머에는 한 번도 마주해 본 적 없던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상으로만 그려온 풍경들, 정확한 단어 하나로 완전히 다른 빛을 띠는 마음들, 말이 되기 전의 감정들이 느슨하게 흘러 다니는 공간, 그런 세계를 따라가고 싶었다. 존경하던 작가들의 책이 하나씩 늘어났을 때, 그 얇은 전율을 느끼고 싶었고, 언젠가 나도 그런 책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방향을 잃었다. 어느새 책을 만들고 싶었던 이유보다 이름표를 얻는 데 집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가 나를 알아봐 줄지, 무엇을 따낼 수 있을지, 어느 상에 내 이름이 걸릴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이 중심을 차지했다.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막상 쥐려 하면 사라져 버리는 것, 그 덧없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밤늦게 거울을 보면, 표정은 흐려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미완의 문장이 몇 줄씩 흩어져 있었다.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실은 한동안 무엇을 위해 이 모든 시간을 들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조용하던 밤이었다. 밖에서는 흔하디 흔한 자동차 소리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앉아서 책상 한가운데 빈 노트를 놓던 그때, 시야가 흔들리면서 파노라마처럼 장면들이 잔물결처럼 일어났다. 어린 시절, 도서관 한 편에서 우연히 펼쳐본 한 문장, 대체 무엇이 좋았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세상이 나를 부르는 느낌,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단어가 만들어내는 균열을 믿기 시작했다.


그 확신은 어설펐지만 진짜였다. 무작정 상을 좇던 지난날의 집착이 한순간에 의미를 잃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때만큼은 도달하려 했던 궁극의 지점이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펜을 집어 들고 있었다. 손끝에는 묘한 전기가 걸린 듯했고 기계처럼 단어들이 잇따라 떠올랐다. 새로 태어나는 감각은 붙잡으려고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또렷했다. 그 밤이 그랬다. 계산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글자가 자연스럽게 또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생각과 생각 사이에 놓인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단어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갔다. 몸을 뒤로 젖혔다가 다시 앞으로 숙여 종이를 바라보았다. 잊고 있던 원래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던 것 같았다. 책을 만들고 싶었던 이유, 내가 문장을 사랑하게 된 순간, 쓸 만한 문장을 만드는 작가들에 대한 오랜 동경, 그리고 한동안 놓쳤던 순수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읽어주고 v평가는 계산에 아예 없었다. 형체도 없고, 정확히 어디서부터 생겨난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꺼져있던 장작불이 다시 타올랐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이유였다. 누군가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단단하고도 조용한 이유, 그날 밤에야 그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5


얼마나 흘렀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써 내려갔다. 내 머리와 상관없이 종이를 파고들었다. 어둠을 직시할 수 있을 만큼만 밝고, 뜨겁지 않은 불빛, 그 아래에서 나도 몰랐던 생각들과 만났다. 이런 나라면 언제라도 어떤 이야기도 쓸 수 있었다. 표현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번져갔다. 하지만 원하던 시간은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갑자기 멎어버렸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그다음 문장이 종이 위에 닿지 않았을 뿐이었다. 손을 멈추고 종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펜을 다시 들었지만 떠오르는 말들이 형태가 흐린 돌멩이뿐이었다. 잡아보면 부서졌고, 이어 붙이려 하면 서로 도망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이끌던 뮤즈는 어디론가 빠져나가버렸다. 의미를 찾으려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방금 전의 글자들은 멀게만 느껴졌다. 내용이 아니라, 무덤 같았다. 막다른 골목에 남겨진 벽돌 더미처럼 어딘가 쓰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 데도 맞지 않는 파편들뿐이었다. 다시 문장을 이으려 했다. 줄거리를 억지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새로운 등장인물을 등장시키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대로였다. 물속에서 불을 붙이는 행동에 불과했다.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엉키고 쓰러졌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하늘색 칠이 벗겨진 천장의 표면이 갈라져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곁에 있던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뒤 남겨진 의자를 보는 것 같았다. 아무도 읽지 않을 문장, 어딘가로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이야기의 조각, 심지어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까지 쏟아냈지만 종이는 버거워 보였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이야기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동안 뚝하고 끊어졌다. 마음의 끈인지, 문장의 줄기인지, 분명한 단절이었다. 펜을 내려놓았다. 손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노트를 덮어버렸다.



6


책상 모서리에 원고 뭉치를 올려두었다. 낡은 스탠드 조명이 페이지 가장자리만 비추고, 바깥 복도에 남은 저녁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문장을 검토하는 일은 지긋지긋할 만큼 익숙했다. 오탈자를 수정하고, 단락 사이의 숨을 맞추고, 말의 균형이 어긋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이 작업이 글을 다듬는 일인지, 아니면 삶의 패배를 더 보기 좋게 포장하는 과정인지 모르겠다. 프린터가 종이를 밀어내는 동안, 부엌에서 따뜻한 물을 끓였다. 컵에 녹차 티백을 넣고 기다리는 몇 초가 이상하리만큼 진지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소박한 음료 한 잔조차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 같았다. 인쇄가 끝나면, 종이를 들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페이지 상단에는 늘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별 의미도 없는 글자일 것이나 지금은 전쟁의 깃발이었다.


며칠 뒤, 메일함에 새 메시지가 떴다. 열어보기도 전에 결과를 알고 있었다. 편집부의 사과가 담긴 정중한 문장, 심사위원들의 감사, 그리고 다음 기회를 기원한다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지 않아도 알고 있는 패턴이었다.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메일을 닫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눌려 들어갔다. 누가 옆에서 괜찮았냐고 묻는다면 딱히 이유 없이 피곤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다른 설명은 오래 걸리거나, 혹은 진심이 될 것 같았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오늘은 제각각의 사정으로 힘든 하루일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노란 형광등 아래에서 번호표를 잡고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자, 봉투를 올려놓았다. 직원은 주소를 확인한 뒤 등기로 보낼 거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 순간, 봉투가 작은 심장을 가진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는 감추고 싶은 것들과 누군가에게 닿고 싶었던 것들이 섞여 있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초겨울의 바람이 콧등을 스쳤다. 내가 보내온 수십 수백 개의 봉투들이 지금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했다. 누군가의 책상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어느 새벽, 파쇄기에 갈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 반복되는 일상이 나를 부서뜨리는 대신 오히려 더 깊숙이 어딘가로 파고 들어가게 만들었다. 마치, 거절이 반복될수록 세상에 닿을 가능성이 한 줄씩 생긴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자라났다. 집으로 돌아와 파일을 열었다. 새 제목을 입력하다 말고 지웠다. 또 다른 제목을 적었다가 다시 지웠다. 오늘도 단 한 문장이 따라오지 않았다. 아직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은 적도 없고 어떤 편집자도 내 원고를 기억하지 못하고, 문장들은 번번이 미끄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이 적힌 봉투를 맡기는 그 짧은 순간만큼은 이 세계가 잠시나마 호의적으로 기대어 있었다.



7


오래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원고지 뭉치와 작년 문학상 발표 기사들이 포개져 있었다. 그 제목들 옆에는 형광펜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이름이 비어 있는 묘비들처럼 보였다. 얼마 전까지 매번 원고를 봉투에 넣어 부쳤다. 어떤 날에는 우체국의 낡은 의자에 앉아 등기 영수증을 구겼다가 펴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것은 전쟁에서 돌아온 장병이 훈장을 만지작거리는 손길과 다르지 않았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전장에서 승리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물러섬 없이 계속 무너지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우스울 뿐이었다.


세상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을 아직도 쓴다고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나를 바라볼지도 모른다. 아마 돈키호테일지도 모른다. 물론 풍차를 공격하지도 않고 창을 든 적도 없지만 세상이 내게 얹어 둔 조롱의 무게는 그 옛 기사에게 쏟아지던 조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아침 일찍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 전 커피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퇴근 후 무릎이 뻣뻣해진 다리를 스트레칭하며 요가나 필라테스에 등록해야 할지 고민하고, 상사의 비위를 맞추거나 매년 연말이면 성과 평가에 마음을 졸이는 삶을 상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컴퓨터를 켰다. 이름 없는 파일이 여러 개 줄지어 있었다. <마지막 원고(진짜)>, <진짜 최종_이번에는>, <이게_무슨 짓인가> 등등, 그걸 보며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파일 이름들만 모으면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늘도 문장을 쓰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손가락은 움직였다. 오래된 동물적 감각이 이제는 생각보다 먼저 글을 찾아가는 것처럼 그렇기 쓰기 시작했다. 아직 실패는 계속되고, 이름은 존재 자체를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귀에서는 이제는 놔주라고 속삭이는 환청도 들리지만 어쩌면 계속 쓰는 이유는 이 세계에 맞서기 위한 것도,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저 내가 살아 있었다고 말해줄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웃음을 사더라도, 때때로 내가 우스워져도, 이 싸움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내일도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실패한 문장 속에서라도 나를 잃지 않게 계속 끄적여 볼 생각이다. 화면이 여전히 하얗고 비어 있지만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남겨둔 자리 같았다. 언젠가 다다를 수도 있는, 혹은 끝내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 그 모든 이름들을 위한 자리다.


그래도... 맞춤법은 적어도 예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나?


아무런 대답은 없지만 그 깊이를 가르는 미약한 타자 소리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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