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지기

by 무무

1


바다는 검었다. 검다는 건 색이 아니라 말이 닿지 않는 깊이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각에 불을 켜는 사람이다. 빛은 멀리까지 닿지 않는다. 바다 한가운데를 비추는 일은 없다. 다만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어둠이 옅게 하는 것일 뿐, 그게 전부다. 등대의 불빛이 돌 때마다 벽에 걸린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인다. 가끔 그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바다를 등지고 걸으면, 내 등 뒤에서 불빛이 따라오고 그때마다, 내가 세상을 비추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비추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불빛은 정해진 속도로 돌아가고, 파도는 그보다 더디게 밀려온다. 모든 것은 제각기 서로 다른 결로 흘러가지만, 결국 하나의 시간 속에서 만나게 된다. 여기서 나는 그 리듬 속에 몸을 두는 법을 배운다. 세상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깨어 있다.


시내의 불빛이 남아있는 새벽이 오기 전, 유리를 닦는다. 밤새 염분이 달라붙어 불빛이 탁해진다. 물기가 없는 마른걸레로 바다의 흔적을 지워내며, 다시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이 단순한 일이 기도보다 오래 남는다. 그다음에는 등유를 채운다. 기름이 반쯤 남은 깡통을 들어 불빛의 배를 채운다. 불은 타오르기 위해 늘 무언가를 태워야 하고 어쩌면 인간도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한다. 살아간다는 건 스스로를 태우며 빛으로 남기는 일, 이 세상의 모든 불빛은 결국 자신을 줄이며 타는 존재들이 만든 것이라는 생각에 그저 무덤덤하게 기름을 채운다. 조난 신호를 점검한다. 버튼을 누르면 짧은 음이 울리고 바다 밑바닥까지 닿는 것 같다. 그 한 번의 진동으로, 바다 전체가 응답하는 착각이 들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침묵이야말로 내가 지켜야 할 세계다. 식사는 비교적 간단하게 먹는다. 식은 밥 몇 숟가락을 입에 넣고 겨우 삼키고 평소보다는 적게 먹는다. 많이 먹으면 밤새 이 지루한 일을 할 수 없고,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이 시간을 서두르지 않고 머물 수 있게 만든다. 어둠의 광막한 바다를 보고 있을 때, 인간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만난 기분이 드는데 그건 아마도 기억일 것이다.


일과가 끝나면 날씨와 파도의 높이를 노트에 적는다. 그 기록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고 별것 없지만, 하루의 끝을 증명하는 일종의 문장이다. 문장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가 오늘을 견뎌냈다는 흔적이기에 그날의 파도와 바람을 적으며, 이 세상에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다는 희망 아닌 희망을 붙잡는다.


밤이 길어질수록, 바다는 적막해진다. 파도는 멀리서 속삭이고, 바람은 언덕 위에서 길을 잃는다. 그때마다 불빛의 끝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나를 본다. 나를 아는 유일한 것은 이 끝없는 물결뿐일 것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야 할 때도, 잠시 기다린다. 그리고 불빛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기다림 속에서만 세상이 멈추고 내게는 그 어떤 염원보다 길게 머무른다.


불빛이 처음으로 꺼졌을 때는 어둠의 무게를 느꼈다. 그건 공포가 아닌 빛이 나를 보호했던 것이 아니라, 나를 가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빛의 바깥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등대의 창문에 얼굴을 비췄다. 어느새 늙어버린 얼굴, 삶의 피로, 그러나 아직은 지켜야 할 무언가가 남은 쓸데없이 비장한 표정이 보였다. 아무도 지켜봐 주지 않는 세상의 끝에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퍽 아름답게 느껴졌다. 바다는 여전히 검고, 불빛은 여전히 돌았다.



2


불을 끄고 난 뒤 등대의 창가에 서 있었다. 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먼바다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빛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바다의 첫 숨이 피어올라야 등대의 불빛을 완전히 끌 수 있는데, 그 빛은 느리지만 망설임 없이 수평선 위로 번져 나갔다. 손에 묻은 기름 냄새를 느끼며 먼저 깨어 있었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을 삼았다. 멀리서 배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검은 점처럼 출발한 배들이 점점 커지며 포구를 향해 밀려왔다. 배들이 마치 밤의 마지막 잔해를 실어오는 듯 그들은 고요를 끌고 들어오고, 곧 소리로 남기기 시작했다. 바닷가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 무거운 고무장화를 신은 노인들, 손에 바구니를 든 여인들이 하나둘 제각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오래된 습관의 어수선함과 정확함이 묻어 있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누군가는 그 시간에 생계를 얻고, 또 누군가는 그 생계를 비추는 불을 지켰다. 그 둘은 서로를 모른 채, 같은 새벽을 살고 있었다. 등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은 장난감 같이 보였다. 모두가 자신만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앞으로 등 떠밀었고 나도 그 한 틈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외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 부분으로서 이 질서 속에 섞여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차분히 눌러줬다. 바람이 불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올라왔다. 귀를 기울이고 있지만, 구체적인 무슨 말은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흩어진 소리들만이 남아 공기 속에서 흔들렸다. 그 소리들 속에 내 숨소리를 조심스레 섞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숨이었다. 새벽은 그렇게 완성되어 되었다. 하늘은 이미 밝고, 바다는 일상의 색을 되찾았다. 잠시 눈을 감고 눈꺼풀 뒤로 빛이 스며들면 짐을 챙겼다. 그 빛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마음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이 안에서 깨어나는 세상을 느끼며 하루를 잘 보냈음에 감사히 여겼다. 소란스럽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호흡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며 낮이 시작될 시간을 맞이한다. 언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발밑의 자갈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등대에서 내려온 지 한참을 지나, 바다의 냄새가 옷에 배어있었다. 평소와 다를 게 평범한 낮이지만, 아마도 다른 하루일 것이 분명했다. 그 차이를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눈에 들어오는 빛의 방향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속도 또한 미묘하게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동네의 시내는 작은 편이다. 도로 한가운데로는 낡은 트럭이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느긋하게 지나가고, 그 옆으로는 고양이 한 마리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가게 앞에는 채소를 내놓은 상인들이 있고,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어딘가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그 음악을 성의 없이 지나쳤고,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이러한 평범함이 오히려 편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했다. 시장 골목을 지나며 발을 멈출 때가 있었다. 손수건, 신문, 오래된 잡지, 빛바랜 책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그것들은 누군가의 하루고, 한때의 마음이었다. 나 또한 완벽하지 않았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만 진짜 인생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일주일에 두어 번 가는 책방 골목으로 향했다. 낡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나무문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삐걱 거리는 나무 바닥이 발아래에서 울렸다. 서가 위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책 사이로 햇살을 파고들었다. 그 빛은 종이 위를 스쳐 지나갔고 그 움직임을 바라보며 책의 모서리를 만졌다. 책의 표면은 파도처럼 거칠고 그 안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이 고여 있었다. 눈에 띄는 양장본 표지의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표지가 거의 지워진 책이었다. 책장을 펼치자 낯선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이란 건 이상하게도, 늘 누군가의 마음속에만 온전히 남는다.


마음에 들어온 문장을 이어서 내려 읽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은 사이, 밖에서는 사람들이 오가고 트럭이 지나가며 햇살이 유리창 위를 건너며 오후로 흘러가고 있었다. 책을 덮으며 여러 생각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생각보다 오래 머물던 서점의 문을 나섰다. 종이로 묶인 한 권의 책이 손에 들려있었다. 그것은 타인의 꿈을 봉인해 둔 봉투와 닮아 있었다. 책등에는 잊고 있던 작가의 이름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추억을 상기시켜주었고, 타임머신을 탄 거 같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 속에는 지워지지 않은 잉크 냄새가 섞였다. 돌아가는 길은 늘 그렇게 한적했다. 골목의 가로등이 하나둘 깨어나고, 전날의 파도가 남긴 소금기 어린 냄새가 공기를 적셨다. 책을 품에 안고 걸었다. 그 안에는 아직 펼치지 않은 문장들이, 잔잔히 숨 쉬는 생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사유가 종이 속에서 나를 기다렸고, 이유 모를 뿌듯함을 주었다. 글로 오늘 밤을 함께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길모퉁이를 돌자 모서리가 부서진 벽돌담 위로 달빛이 흘렀다.


책 속 문장을 베껴 적던 옛날의 나를 떠올렸다. 학교가 끝난 뒤, 버려진 공책의 여백에 문장을 적어 넣었던 그 시간들, 세상이 나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그 문장들은 나를 기억해 줄 거라 믿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 그 믿음이 이 자리로 데려온 것인지 생각해 봤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책을 열었다. 제목이 흐릿하게 보였다. 책장 사이에는 누군가 남겨둔 짧은 메모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일은, 누군가의 기억을 잠시 빌려 쓰는 일이다.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이 말이 내게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그 문장을 닫는 순간, 세상이 입을 다물었다. 바다의 소리와 내 걸음이 같은 박자로 이어졌다.



2.5


뜨거운 물을 컵에 붓는 속삭임이 방 안에 부풀어 올랐다. 물이 바닥에 닿을 때 얇은 울림이 카페에서 들리던 의자 끄는 소리와 겹쳤다. 갑작스러운 기억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계속 훔쳐보던 여음이 마침내 형태를 드러낸 것뿐이었다.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 진동이 나무의 결을 타고 번졌다. 그 진동이 시간의 아래쪽에 묻어 있던 장면들을 툭 건드렸다. 정신을 차리고 스웨터를 꺼내 입으려다 손끝이 멈췄다. 떠나오던 날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질감이었다. 그날의 촉감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단단하고 거친 실들이 피부에 닿는 순간, 잊었다고 생각했던 떨림이 되살아났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울림.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촉감. 그날의 각인된 문신이 몸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꽤나 거북했다. 이곳에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도시에서 빠져나온 지가 이미 꽤 된 것 같은데도 몸은 여전히 시간을 따라오지 못한 채 어디선가 멈춰 있었다. 스웨터를 끌어올려 어깨에 걸치며 숨을 고르려 했다. 이 방의 공기와 도시의 공기가 아직 섞여 있는 착각을 해서 그런지 숨은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과거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도 긴장된 어깨가 내려가지 않았다. 그 긴장은 모양을 잃은 채 방치해 둔 상처처럼 달라붙었다.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기울어진 채 삐걱거림을 냈다. 그 소음마저 카페의 의자와 비슷했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가락이 온도를 버티지 못했다. 이 떨림은 전날의 일이 아니라 기억의 파편 저 너머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다. 떠나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보여주는 흔적이었기에 컵을 내려놓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목 뒤를 타고 올라왔다. 아마 지금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 방의 고요 속에서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오래 버텨왔다. 견딘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도시는 내게 무엇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말을 했지만, 그 말들은 공중에서 흩어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먼지일 뿐이었다. 그 속을 걸을 때, 끊임없이 세상에서 밀려났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결국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표류했다. 지하철의 흔들림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왜 움직이는지도 잃어버렸다. 창에 비친 얼굴은 낯설었다. 하루의 끝에서 늘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이 삶을 계속 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만이 응시했다. 그즈음에 그녀가 있었다. 가로등에서 내리던 빛이 예뻤던 저녁, 말없이 마주 앉았던 시간이 있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바라보는 방향은 어긋났다. 작은 균열은 갑자기 커다란 틈이 되었고 주변 친구들과의 거리도 비슷했다. 같이 웃던 시간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가 많아졌다. 누군가는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 가야 한다고 말했다. 숫자가 대화를 대신했고, 속도가 우정을 결정했다. 멈추고 싶다는 말은 그들 사이에서 무능으로 읽혔다.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설명을 요구받았다. 점점 말을 잃었다. 말이 사라진 자리는 소멸이었다.


이미 식어 있는 커피 손잡이에 닿은 온기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이 닿았다가 흩어졌다. 붙잡아야 한다는 감각이 사라진 눈이었다. 손가락을 깍지 낄 듯 말 듯 테이블 위에서 접었다. 그녀도 비슷해 보였다. 서로의 손등이 닿을만한 지점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숨이 들고 나오는 사이가 길어졌고 손끝이 떨렸다. 의자를 밀 때 나던 그 소리가 마지막 문장처럼 남았다. 한 사람은 창 쪽으로, 한 사람은 문 쪽으로. 돌아보지 않고 일어섰다. 문이 닫히고 정적이 몸을 파고들었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결국 무너졌다.

그날 밤은 숨조차 들이마실 수 없었다. 공기가 목에 걸린 돌처럼 무거웠고 누워도, 서 있어도, 걸어도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벌린 입속으로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이 단단하게 굳었고 심장만이 빠르게 박동했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 없이 찾아온 결심대로 누구의 허락도 없이 그곳을 떠나왔다. 다음 날, 책 몇 권과 노트 하나, 오래 쓰던 펜을 챙겼다. 옷 몇 벌을 넣고 가방을 닫았다. 발이 붙잡힐 것 같아서 뒤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역으로 향하는 길에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기차가 움직이고 창밖의 건물들이 뒤로 흘러갔다. 회색의 덩어리들은 낮아졌고, 도로의 긴 줄무늬는 끊어졌다. 도시의 경계가 멀어지는 대로 다시 숨이 온전히 돌아가는 기분을 되찾았다. 빈 공간이 그렇게 채워졌다.


도착한 곳은 적막했고 바람이 느리게 움직였다. 어디에도 사람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밤이 오면 모든 소리가 가라앉았고 그 속에서 나는 긴 시간을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누구도 나에게 속도를 요구하지 않았다.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살아보기로 했고 남은 시간을 다시 쌓아가기로 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며 숨의 리듬을 되찾아보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이곳에서 처음으로 내 안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도시의 소음보다 내게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3


햇빛이 등대의 벽에 닿았다. 그 빛은 벽돌의 틈마다 박혀 있던 소금을 녹였다. 파도는 멀리서 부서지며, 그 끝자락이 등대의 발끝에 닿을 때쯤에는 이미 다른 파도가 태어나 있었다. 세상은 늘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며 앉아 있는 게 내 일이었다. 유리창에는 바람의 흔적이 없었다. 유리 안쪽에는 어제의 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위를 온몸으로 스치면, 박물관 유물들을 몰래 더듬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분명히 지나갔음을 알고 있었다. 빛이 그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등대 안에는 소리의 결이 거의 없었다. 가끔 벽에 부딪힌 물의 그림자만이 흘렀다. 책을 펼쳤다. 활자들이 바다의 파도처럼 움직였다. 단어 하나가 또 다른 단어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책 속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이 나란히 움직이는 순간, 나는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등대의 바닥은 오래전 기름이 스며든 나무로 되어 있었다. 걸을 때마다 숨 쉬는 소리를 따라가면,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또렷해졌다. 삶은 그저 그런 반복이었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세상을 새로 읽는 법을 배웠다. 모든 빛은 한 번씩은 자신이 스쳤던 자리를 다시 더듬는다. 그게 낮의 일이고, 나의 일이었다.


점심 무렵, 등대 밖으로 나왔다. 햇빛은 하얗게 번졌고, 바다는 종이처럼 얇았다. 갈매기 한 마리가 그 위를 스치며 그림자를 남겼다. 그 그림자가 발끝까지 닿았다가 이내 흩어졌다. 세상의 움직임이 주춤했으나 멈춘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 시선이었다. 계단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오늘의 바다를 기록하려다, 아무 말도 적지 못했다. 언어는 바람과 같아서, 붙잡는 순간 흩어졌다. 그래서 바다의 표정을 따라 그렸다. 한 줄, 또 한 줄, 단어 대신 선이, 문장 대신 빛이 남았다.


멀리서 뱃고동이 울렸다. 일종의 인사였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지금 지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지나는 것만이 남는다는 걸,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등대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발을 멈췄다. 내가 남긴 발자국 위로 햇빛이 고여 있었다. 파도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건 바다이자 지나간 언어의 그림자였다. 언젠가 누군가가 쓴 문장을, 오늘의 공기로 읽고 있었다.



4


바다는 낮에 꽤 부끄러움을 탔다. 물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잔했다. 책을 펴놓은 채,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누가 강제로 읽으라고 하지 않아도, 세상이 나를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책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습기와 소금기가 얽힌 냄새 속에서 글자들은 피어올랐다. 어떤 문장은 뼈처럼 단단했고, 어떤 문장은 살짝만 부딪쳐도 부서질 듯 연약했다. 나는 그 둘을 다 사랑했다. 삶이란 단단함과 부서짐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문장을 읽다가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아직 닿지 못한 문장을 수평선 따라 들어갔다. 책은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기보다, 멈추는 법을 알려주었다. 세상이 앞으로만 밀려가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뒤로 물렸다.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책 한 권을 완전히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세상은 언제나 균형을 잃기 쉽고,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시 세워야 한다.


등대에서의 하루도 이렇다. 사람은 오지 않고, 파도는 저마다의 기분의 높이로 밀려왔다.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균형을 다시 세우는 일뿐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 했다. 읽는다는 것은 균형을 되찾는 일이었고, 무너진 마음의 각도를 바로잡아 가는 일, 그게 궁극적으로 내가 할 일이었다. 오늘은 얇은 메모지를 끼워 넣었다. 감히 새로 한 줄을 더했다.


나는 오늘도 무너진 문장 위에 하루를 세운다.



5


해가 완전히 사라지면, 등대는 살아난다. 낮 동안 숨을 고르던 철제 난간이 밤의 공기와 맞닿으며 울린다. 등대 계단을 오른다. 발소리가 벽에 닿으며 다시 내 귀로 돌아온다. 하루의 끝에는 같은 냄새가 진동한다. 기름, 먼지, 그리고 파도에서 날아온 소금기, 그 냄새는 아버지의 작업복에서 나던 냄새와 닮아 있다. 손전등을 들어 기계실을 점검한다. 그저 공기 속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부딪히고 흩어지는 먼지들을 바라본다. 계기판에 손을 대본다. 바다는 멀고, 배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간, 세상과 거기를 잰다. 고립된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등화의 각도를 조정하고, 바람의 방향을 기록하는 것뿐이다. 그러고 나면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낮에 읽던 책을 펼쳐, 단어와 문장들 사이를 유영한다. 책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는 유명한 작가의 말이 맴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손에는 따뜻한 주전자와 빵 반쪽을 들고 있고 혼자 식사를 하다 보니 씹는다는 것은 시간을 나누는 일이고, 삼킨다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멀리서 고기잡이배가 돌아오고 있다. 그 불빛이 수면 위에서 흔들릴 때, 이유 없이 꽉 쥔 손을 놓은 듯하다. 누군가가 멀리서라도 하찮은 나를 확인해 주는 신호 같다. 서로의 불빛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인지라 누군가의 길을 비추기 위해 내 안의 어둠을 매일 밀어내며 오늘도 이 불을 같은 방향으로 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22시 45분, 바람 남서풍, 파도 잔잔.


기록은 간단하지만, 그 뒤에는 많은 생각이 있다. 기록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오늘 내가 버티어낸 하루의 무게다. 창문을 열자, 바다 냄새가 한꺼번에 들어온다. 등대의 불이 일정한 속도로 회전한다. 그 빛의 주기를 세며, 이렇게 불을 켜는 일이 누군가의 항로를 밝혀주는 일이라면,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기에 충분하다. 밤은 절대적으로 길지만, 괜찮다. 등대는 그 긴 시간 속에서도 한 번도 불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6


오늘도 어둠이 퍼진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 사이에 내가 서 있다. 등대는 말이 없다. 불이 깜박일 때마다 세상의 가장자리도 흔들린다. 불이 닿지 않는 곳을 바라보다 그곳이 닿을 수 없는 자리이기에, 그곳에서만 나를 볼 수 있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온다. 그 소리는 가까워서, 어쩐지 가슴 한구석을 파고든다. 등대 안에서 숫자가 아닌 숨으로, 시간이 아닌 체온으로 하루의 무게를 잰다. 책을 옆에 둔다. 굳이 펼치지 않아도 된다. 그 존재만으로 이미 세계와 닿는다. 밤은 깊어지고 바다는 나를 삼키지 않는다. 바다의 숨소리를 따라 기억나는 단편들을 더듬는다. 무언가를 잃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새로 가지려 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복기한다.


파도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세상도, 마음도,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 그 사실이 설명이 필요 없는 위로, 이유 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가장자리, 그 하루가 남긴 기록을 꼭 쥐고 있다. 책은 탁자 위에 반쯤 펼쳐져 있고 여러 문장들이 하나가 되어 감정으로 남는다. 바다의 언어처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된다. 새벽의 공기가 등대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짙은 어둠은 깔려있지만 분명 바다는 쉬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부딪히는 철의 소리, 멀리서 깨어나는 새의 첫울음, 그 모든 것이 서로를 묘하게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만들어버린다. 불을 끄지 않고, 그 불빛이 바다의 가장 먼 곳까지 닿는 걸 지켜본다. 그 텅 빈 마음이 좋다. 무언가가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 그 기다림이 살아있는 이유 중 하나다. 새벽은 그렇게 온다. 아무 말 없이, 등대의 유리창을 타고 들어온다. 책을 덮는다. 손바닥에 남은 문장의 열기를 느낀다. 세상은 아직 깨어나지 않는다. 어딘가에는 첫 불을 누군가가 켜고 있을 것이다. 등불을 끈다. 어둠 속에서, 다음 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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