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보낸 편지

by 무무

1


주말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문을 연 뒤 책등을 하나씩 정렬했다. 전날 들어온 책의 상태를 다시 살피고, 구석에 놓인 작은 주전자에 물을 붓는 일까지, 특별할 것 없는 시간들을 쌓아 올렸다. 평범한 일상을 준비하다, 조용했던 전화기가 울려서 나의 하루를 틀어놓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문장들이 꼭꼭 감춰 두었던 심경을 꺼내놓아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걸려온 전화는 유품정리사였고 문학 촌에서의 요청이라 했다. 남겨진 책무더기가 많아,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판단해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집중해서 들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문학 촌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오래전 내 이름을 적었던 페이지들이 펼쳐졌다. 말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문장들, 한때 그곳에서 조그만 강연을 한 적도 있었지만 당연히 나라는 존재를 기억할 리 난무했다. 두 번째는 치부하는 시인의 서재였다는 말이었다. 누군가의 생애를 단 한 문장으로 묶어버리는 그런 식의 납작한 평가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오후에 가서 책을 가지러 간다고 했다. 누군가의 마지막 정리를 대신 맡게 되는 일, 어쩌면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그 풍경은 들을 때마다 서툴렀다.


문학촌의 초입은 계절에 상관없이 눅눅한 종이 냄새가 맴돌았다. 오래된 종이들이 떨어져 나간 뒤 남은 온기가 벽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어떠한 표시도 머무른 기색 없이 떠나는 사람의 서재에는 천 권은 족히 넘을 책의 숲을 가지고 있었다. 시집이 대부분이고, 필사본도 보이고 고서적들도 몇 권 눈에 띄었다. 방 안이 한 시대의 숨을 들이켜고 내쉰 흔적처럼 어수선했다. 불분명한 연도들이 적힌 묶음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인의 삶을 감히 추측하고, 그런 인생의 마지막 윤곽인 책들을 조심히 옮길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태워버리라고 남기고, 누군가는 아무에게도 건네지 못한 채 사라지고, 또 누군가는 골칫거리라는 말에 묻혀 애매한 폐기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서로 부딪히며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상자 속의 책들을 들어 올릴 때마다 종이가 눌리며 내는 숨이 손에 적셨다. 그 무게를 알고 있는 나는, 쓰지 못하게 된 뒤에도 책을 정리하는 일만큼은 그 무게를 놓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했다. 몇 해 전, 어쩌면 더 이전부터 글 대신 다른 사람의 문장을 옮기는 일을 택했다. 그 선택이 나를 지켜주었다고 믿었지만, 이따금 멈춰 세운 것은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 책들이 가득 실린 카트를 끌고 좁은 복도를 지나는데 바닥에 번진 옛 잉크의 얼룩이 시야에 걸렸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남긴 어두운 흔적, 그 지점을 바라보다 다시 카트를 밀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고, 남은 문장은 남는다. 그 순서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확인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고요했다. 낯선 겨울의 끝자락이 길 위에 내려앉았다. 트럭 뒤 칸에 책을 차곡차곡 옮겨 싣고 지나가는 바람이 창백한 표면을 쓰다듬으며 먼지를 털어내는 모습을 잠시나마 감상했다. 그렇게 또 한 사람의 시간이 내 손을 거쳐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이름 없이, 흔적 없이, 질문만 놓인 채 말이다. 오늘 일은 단순한 운반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마지막 독서가 시작되기 직전의 정적을 전달받는 일이었다.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돌아보며, 그 안쪽의 바람은 더 이상 내게 닿지 않았다. 운전을 시작하자, 짐칸의 책들이 맞닿았다. 부유하고, 떠돌고, 결국에는 받아들여질 문장들, 한때는 분명 누구의 심장에서 나온 말들이었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 다만 그 끝이 어디에 닿을지, 누구의 손으로 거칠지 알 수 없을 뿐, 멈춰 있던 시간이 풀리기 시작했다.



2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익숙한 길이고 차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발걸음이 땅에 잘 닿지 않았다. 트럭에서 상자들을 내려놓는 일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릴지 모르는 비를 대비해 천을 크게 덮었다. 그러다 떨어진 유난히 가벼운 상자 하나만을 들고 3층 집으로 가지고 올라왔다. 수백 권의 무게 사이에서 가벼웠던 그것이, 오히려 가장 무거운 기척을 품은 것 같아서 눈에 밟혔다. 계단을 오르며 상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부가 텅 비어 있는 듯 조용했다. 문을 열자마자 책방에서 묻어온 종이의 냄새가 방과 하나가 되었다. 조명을 켜지 않고도 걸음을 옮길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구조였기에 바로책상에 박스를 올려놓았다. 덮개를 열고 몇 권의 책과 필사 노트를 가지런히 놓았다. 시인이 마지막으로 손댔을 가능성이 높은 물건들, 그러니까 어떤 말들이 이 책들 사이에서 생의 끝자락에 숨을 쉬고 있었을지 모르게 하는 그런 것들, 책을 손에 올려놓자 종이가 버텨온 시간의 흔적 그대로 굽어 있었다. 세월의 비장함을 느끼며 책을 펼쳤을 때, 속지 사이에서 얇은 종이가 툭 떨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줍고 지나치려 했지만, 그 종이를 잡았고 시인의 기록을 맞이했다.


나는 나의 구절을 믿지 못한다. 쓴다는 일은 남아 있는 문장들에 대한 채무일 뿐이다.


시인은 스스로의 문장에 대해 어떠한 위로도 남기지 않았다. 짧고 거칠지만 피로하게 솔직한 문장을 남겼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쓴 흔적은 없었다. 오로지 자신에게 목적을 둔 글씨였다. 다음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두 줄로 써져 있었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시들이 나의 생을 더 정확히 말해준다.

읽히지 않을 자유가 나를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짧지만 여운은 가득했다. 가늘게 남긴 그 자국에 오히려 내가 포개져버렸다. 필사 노트를 결국 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삶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지금은 이곳일 것이다. 노트의 안쪽에는 종종 끊긴 문장들, 수정하려다 지워지지 않은 얼룩들, 한 문장을 찾기 위해 되풀이된 단어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 사이에 잘게 접힌 편지지가 테이프에 의지한 채 붙어 있었다. 매달려 있던 시인의 편지를 정성스레 펼치자마자 이 역시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한 말은 없었다. 단지 말이 남는 방식에 대해, 글이 끝내 자신을 거론하는 형식에 대해 적어 둔, 깊숙한 고백이 숨어 있었다.


언젠가 이 문장들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무언가를 쓰려했던 사람으로 남고 싶다.


가슴이 저미었다. 나 또한 비슷한 결의 문장을 적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버티고 싶어서가 아니라 버텨야만 했던 시절이었고, 지금은 거기에 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계속 피해 다니던 과거가 고작 몇 장의 편지로 인해 고요한 밤과는 다르게 속은 시끄러워졌다. 상자 옆을 지나 책장의 책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마 노트와 책들을 다시 상자에 넣지 못하고 책상 위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 문장들이 오늘 밤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알 수 없었지만, 피하고 싶다는 마음과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부딪혔다. 쓰지 못한 채로, 쓰려다 멈춘 채로. 시인의 자조적인 문장들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식탁에 앉아 다시 편지지 한 장을 펼쳤고 또박또박하면서도 날려 써진 글씨를 따라갔다. 시인의 뒷모습에서 이미 잃어버린 문장들과 그가 남기려 했던 문장들을 읽어보았다. 손길이 닿지 않았는데도, 어딘가에서 이야기가 꿈틀거렸다.



3


밤은 편히 지나가지 않았다. 누웠다가 돌아누웠다가 베개 끝을 손끝으로 정리하면서도 눈꺼풀은 감기지 않았다. 자정 무렵에 닫아둔 책장이 계속해서 시선을 당겼다. 창턱에 얇은 선 하나가 남았고, 그 아래에서 종이들이 뒤척이며 기척을 만들었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졌고, 결국 해가 뜨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서점 문을 열었다. 남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바닥이 밤새 내려앉았다. 진열대 위의 책들은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불을 모두 켜기 전, 책상 위에 놓아둔 상자를 바라봤다. 전날 책상에 올려두었던 시인의 책 몇 권이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한 권을 들었다. 표지의 표면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제목 아래의 금박 글씨는 새벽빛을 받아 꽃잎을 건드리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을 여는 순간 누구에게 말을 걸까 망설이는 표정을 담은 듯 계산대 옆에 세워둔 연필 한 자루가 쓰러졌다. 글씨는 단단했고 문장들 사이사이에 감춰진 숨의 방향은 명확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지나간 시간이 한 겹씩 벗겨졌다. 필사한 흔적, 수정하려다 남긴 연필 자국, 종이를 접었던 자리의 얇은 골까지, 시인의 방에서 가져온 책들은 그가 건드린 순간의 온도를 간직하고 있었다.


책장을 한 권씩 내려다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진열대 중 한 칸을 쓸어내렸다. 먼지나 손때가 닿은 자국 없이 깔끔하게 비워진 사각형의 공간이 생겼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곳이 정해진 자리였던 것처럼 그 칸에 시인의 책을 세워두었다. 두 번째 책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세 번째, 책들이 모양을 맞춰 하나의 선을 만들면서 당기는 순간, 표지 안쪽에서 단단히 묶여 있던 실밥들이 알아서 자리를 조정하였다. 서점 한쪽에서 삐걱거리던 의자는 그 변화에 맞춰 등받이를 곧추세웠고, 계산대 옆에 걸어둔 필기구 통은 안쪽에서 흔들려 원래의 중심을 찾았다. 그 일순간이 책에서 흘러나온 듯, 사물들이 나의 선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이 작은 진열대가 시인의 목소리를 머물게 하는 창처럼 보였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책들이 놓인 시인의 칸을 바라보았다. 서점의 다른 책들은 이른 시간대의 빛을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그 칸만큼은 어딘가 깊어 보였다. 새벽의 온도가 그 책들에만 닿아 있었다. 손을 뻗어 표지를 다시 정리했다. 작은 결 하나하나가 어둠과 새벽 사이의 시간을 이어 놓았다. 그렇게 첫 번째 칸이 만들어졌다. 누군가의 마지막 말들이 살아남은 형태로 자리를 잡은 공간, 그곳을 바라보는 동안 멈춰두었던 나의 페이지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4


서점에 시인의 서재가 생긴 뒤, 마음이 가벼워졌지만 그리 길게 유지되지는 못했다. 과거가 먼지가 아니라 기억으로 파고들어왔다. 굳게 잠가두었던 책상 아래, 깊은 서랍을 열었다. 손끝이 닿자마자 표면의 긁힌 자국들이 꽤나 긴 시간 동안 그대로 방치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서랍 안에는 한때 매일같이 쓰던 종이들이 엉켜 있었다. 서로의 모서리를 누르며 그 어떤 것들도 펼쳐지지 않게 하려고 접힌 채로 죽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오래전 나였던 사람이 남긴 묵은 기록이었다. 글씨는 급하게 달려 나갔다가 멈추고, 다시 쓰려다 지워진 자리에 연필의 흑연이 뽀얗게 번져 있었다. 문장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믿던 시절이 내게도 분명히 있었다. 움직이고 도망치며, 때로는 기대를 배반한다는 뜻이었다.


글을 쓰지 못하게 된 날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단숨에 무너진 것도, 그렇다고 큰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느 계절부터인지 문장이 떨어져 나갔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상 앞에 두 시간을 앉아 단어 하나를 적지 못하는 날이 나타났다. 그러다 펜을 잡는 것도 미루는 날이 생겨났다. 그리고는 책상에 등을 돌린 채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글이 먼저 멀어진 것인지, 내가 먼저 등을 돌린 것인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나는 건널 수 없었고, 문장 역시 다시는 나를 찾지 않았다.


헌책방을 시작한 건 도망이자 위로였다. 글이 떠나간 자리에 새롭게 무엇을 메워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누군가 남긴 문장들을 다루는 일을 택했다. 처음부터 서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하루 동안 읽을 책을 찾으러 중고서점에 갔다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서가들을 바라보며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버려진 책들이 가지는 침묵은 내가 쓰지 못한 문장들과 닮아 있었다. 버티거나 말을 잃거나, 주인을 잃은 미아였다. 멈춰 선 시간을 깨우고 싶었다. 잃어버린 문장들을 붙잡지 못한다면 최소한 누가 남긴 문장의 마지막 지점을 지켜주는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서점을 열기 전 살던 집의 창문은 바람만 불면 흔들렸는데 그때마다 버티지 못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방 안으로 무너져 들어오던 건 창문이 아니라 나였다는 걸 인정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원고를 쥔 채 그 창문과 마주했고 결국 인정했다. 이 책상에서는 이제 어떤 문장도 자라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니 오히려 편해졌다. 그래서 책상을 버리고 집을 정리해 서점을 차렸다. 낯선 빛이 드는 공간이었고, 누군가의 글이 남아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더는 쓰지 못하더라도, 다른 이의 문장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시인의 기록을 본 그날 이후 과거의 선택이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그가 남긴 문장들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도 기척을 가졌다. 생이 흐트러지는 순간에도, 글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곳을 향했다. 책장 사이에 남아 있던 밤의 흔적이 사라지고, 바닥에 깔린 정적 위로 새로운 하루의 짐이 올라왔다. 의자에 앉아 시인의 책을 읽었다. 묵혀둔 문장들로 가득했지만 잃어버린 문장이 어딘가에서 다시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5


밤을 걷어내는 소리가 골목 끝에서부터 퍼지고 이른 적막을 깨뜨리는 오토바이가 돌아다닐 때, 서점 문을 열어버렸다. 날이 트기 전, 밤의 색이 걷어내지 못한 채 묘하게 비어 있는 서점 안으로 들어와, 주전자에 물을 담고 끓였다. 손에 편지지를 쥔 채로도 쉽게 적지 못하는 말들이 있었다. 오래전 서랍에 남겨둔 원고가 떠올랐다. 꺼내든 원고는 이 시점, 이 모습으로 나타나려고 미리 써놓은 문장 같았다. 마치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다시 어떤 단어들을 찾도록 이끌었다. 종이를 접어 책 속에 넣는 일이, 첫 문장을 적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내내 들여다보았던 시인의 책들이 진열대 한쪽에서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책등에 찍힌 흠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을 불러냈다.


상자를 열어 낡은 편지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라 부담이 없었고, 몇 줄만 적어도 여백이 남았다. 연필을 들어 글씨를 써 내려가기 전, 단어를 고르는 대신 주변의 사물을 먼저 보는 습관이 나왔다. 진열대 위 책들의 배열, 서점 깊숙한 자리에서 새벽이 밀어 넣은 날카로운 온기, 종이 위의 말이 남긴 자리가 무채색 찰나로 이끌었다. 앉은 자리에서 시인의 책 한 권을 펼쳤다. 그의 메시지를 따라가 끝내 도착한 것은, 쓰지 않고도 남아 있던 무형의 가치였다. 잊힌 목소리가 아니라, 잠시 떠났다가 돌아온 응답이었다. 그리고 편지지 위에 첫 줄을 적었다.


오늘 아침, 당신의 책 속에서 오래 전의 나를 보았습니다.


글씨는 매끄럽지 않았다. 머뭇거린 자리들이 생겼고 지난 시간들의 스치는 자국이 종이 위로 퍼졌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읽었던 책에서 품었던 감정 하나, 소개하고 싶은 구절 하나, 그리고 지금의 요상한 다짐 정도였다. 편지를 접은 뒤, 시인의 책 마지막 페이지 안쪽에 꽂아 넣었다. 이 종이가 책 속에 머무르기만을 바랐다. 누구의 손에 닿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자 바깥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그 리듬이 이 작은 공간의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카운터에 앉아 끓여놓은 물과 커피를 섞었다. 서점 문을 완전히 열며 간판을 밖으로 내걸었다. 바람이 실은 차가운 온기가 얼굴을 스쳤다. 써야 한다는 압박도, 지나간 실패도 이 순간만큼은 멀리 비켜갔다. 언젠가 다시 원고지를 펼쳐야 한다면, 오늘의 이 장면이 시작일 것이다. 아직은 비루하지만 내게는 충분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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