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항상 이동 중이다. 정착은 다음 일정 뒤로 미룬다. 짐은 비교적 가볍게 꾸리고, 생각은 덜어낸다. 비행 전날 밤이면 호텔 책상 위에 물건들을 일렬로 가지런히 놓는다. 시계, 수첩, 여권 그리고 늘 같은 책 한 권. 두께도, 색도 매번 다르지만 항상 같은 제목이다. 판본이 달라지지만 책을 열 때의 마음은 비슷하다. 공항은 하루에도 몇 번씩 표정을 바꾼다. 아침에는 붐비고, 밤에는 무표정하다. 그 사이를 나는 오간다. 누군가에게는 출발이고, 누군가에게는 귀환이지만 내게는 그저 통과에 불과하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친다. 읽던 페이지가 아니라, 아무 데나 연다. 문장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눈으로 읽기보다, 손으로 종이를 누른다. 어느 도시에 가든 책을 찾는다. 서점이 먼저고, 숙소는 나중이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면 분위기부터 확인한다. 정리되지 않은 선반, 가격표가 늦게 붙은 책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만난다. 표지와 종이만 다르다. 어떤 것은 활자가 진하고, 어떤 것은 쉬이 바스러진다. 도망치듯 시작해서, 쉽게 자리를 주지 않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왜 같은 책을 또 사느냐고 묻는다. 미소로만 대답한다. 설명할수록 틀어진다. 취향이 아니라 습관에 가깝고 어쩌면 버릇이다.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책을 가방에서 꺼내지 않는다. 이미 충분하다. 그날의 도시가 책 속에 들어와 있고 책의 문장이 다시 나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파리는 늘 비켜간다. 몇 번이나 일정표에서 이름을 봤다가 지워진다. 그 도시를 미뤄두는 동안, 책은 한 권씩 늘어난다. 사람도 장소도 아니다. 다시 펼쳐도 처음과 같지 않은 문장, 그것이 필요하다.
2
기내 조명이 단계적으로 낮춘다. 천장에 매달린 불빛들이 하나씩 힘을 뺀다. 사람들은 담요를 끌어당기고, 고개를 기댄다. 눈을 감는 대신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이번 판본은 유난히 얇다. 모서리가 쉽게 닳을 것 같다. 종이를 넘기기 전, 손끝으로 책등을 문지른다. 제목이 새겨진 부분이 미묘하게 들어가 있다. 페이지는 아무 데나 열린다. 읽던 자리도, 표시해 둔 곳도 아니다. 신기하게 늘 비슷한 문단에서 멈춘다. 의도하지 않아도 손이 기억하는 자리, 문장은 역시 머릿속에 있다. 그래서 읽지 않고 그 자리에 둔다.
창밖은 검다. 엔진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진다. 고도계 숫자가 줄어든다. 이 숫자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면 도시는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파리는 아직 이름으로만 존재한다. 조정석 옆에 꽂힌 잡지를 꺼내다 바로 돌려놓는다. 새로운 정보는 필요 없다. 도시는 언제나 도착 후에 설명된다. 그전에는 감정만이 있을 뿐이다. 처음 가는 도시인데도 설렘보다 익숙함이 먼저 가슴에 각인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장소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방이었는지, 어떤 계절이었는지 조차 흐릿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로도 완전히 떠나지 못한 상태였다는 사실만이 또렷하다. 어느 도시에서든 서점에 들어서면 이 책을 왜 찾느냐는 눈빛을 보낸다. 대답은 늘 짧다. 길게 말하면 설명이 되고, 설명이 되면 다른 책이 된다. 판본은 늘 다르다. 글자의 밀도도, 종이의 질감도 다르다. 어떤 것은 잉크가 진하고, 어떤 것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소리가 난다. 하지만 특정 이야기는 비슷한 자리에 있다. 페이지 수가 달라도, 줄 간격이 달라도 그 문단만큼은 움직이지 않는다. 되돌아오지만 반복은 아니다. 같은 문장을 다시 만나는 일은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무게로 이 책을 든다.
착륙 안내 방송을 한다. 내 어눌한 프랑스어 발음이 늘어진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는 리듬으로 먼저 남는다. 뜻은 나중에 따라간다. 이 책도 그렇다. 처음에는 결만 남았고, 시간이 지나서야 의미가 되었다. 파리를 떠올리면 새로운 장면보다 이미 지나온 장면들이 먼저 겹쳐진다. 밤 공항의 바닥, 손잡이가 닳은 여행 가방, 문 닫힌 서점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 그 모든 장면 사이에 이 책은 놓여 있다. 기체가 기울며 구름 아래로 내려간다. 불이 켜지기 전의 창문들, 비에 젖은 보도블록, 간판 불이 꺼진 서점의 입구, 그 안 어디에도 같은 글이 그 자리에 놓여있을 것이다.
3
공항을 나서자 눅눅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날씨가 몸에 닿는다. 오래된 도시 특유의 풍경이 발걸음에 치인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걷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자꾸 다른 데로 향한다. 아직 보지 못한 거리보다 이미 알고 있는 문장이 더 신경이 쓰인다. 짐을 풀기 전, 호텔 방의 열쇠를 들고 밖으로 나선다. 시간을 아끼려는 마음은 아닌 그저 미루면 안 될 일이라 여겨서다. 서점은 강을 건너 골목 안쪽에 있다. 간판은 크지 않고 입구는 낮다. 문을 여는 순간, 바깥의 소음이 단번에 끊긴다. 바닥은 닳아 있고, 신발이 닿을 때마다 마찰음이 깔린다. 진열대는 정돈되어 있지만 균일하지 않다. 같은 높이의 책이 한 줄로 서 있지 않고, 크기와 색이 제각각 섞여 있다. 이곳에서는 책들이 분류가 아닌 그저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안쪽으로 들어간다. 계산대 옆에 쌓인 책 더미를 지나, 문학 서재 앞에서 멈춘다. 찾는 제목을 일부러 훑지 않는다. 등 쪽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가다 어느 지점에서 멎는다. 꺼내 들자마자 알 수 있다. 처음 보는 판본이다. 종이는 힘을 주지 않아도 접히고, 표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표정이다. 모서리는 쉽게 닳을 것 같고, 활자는 벌어져 있다. 책을 펼치지 않아도 문장의 위치가 그려진다.
서점은 말수가 적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멀리서 계산기 눌리는 소리만 들린다. 책을 다시 선반에 꽂았다가 곧바로 꺼낸다. 다른 판본을 몇 권 더 살펴봤지만 손이 가지 않는다. 이 책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유도, 특별하다는 확신도 없지만 이 도시에서는 이 판본을 그냥 두고 올 수가 없다. 계산대에 책을 올려둔다. 직원은 아무 말 없이 가격을 찍는다. 가방에 넣지 않고 그대로 들고 밖으로 나온다. 서점 문을 닫자 거리의 소리가 이어진다. 사람들의 발걸음, 먼 곳에서 울리는 경적, 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 사이에서 책은 변하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며 책을 펼친다. 예상한 문단에서 멈춘다. 줄 수가 달랐고, 행간이 넓지만 문장은 그 자리에 있다. 설명할 필요 없이 이미 맞아 있었다. 파리는 이제 막 시작인데 일은 다 끝난 듯하다. 이 도시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방문을 마쳤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신호등 앞에서 멈춘다. 가방을 메고, 책을 손에 든 채,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붙잡을 언어를 손에 쥔다.
4
파리를 떠나는 날, 공항은 밝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적고, 바닥은 막 닦은 듯 천장이 발밑에 놓인다. 비행기에 타서 벨트를 매고 신발을 바꿔 신는다. 조종 핸들을 부기장에게 넘기고 의자에 앉아 파리에서 산 판본을 무릎에 놓는다. 책을 펼치기 전, 무엇을 말하는지 보다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가 먼저 보인다. 창밖에는 도시가 아직 남아 있다. 정리되지 않은 불빛들이 낮은 고도에 머문다. 책을 펼치지 않는다. 어디를 열게 될지 이미 알고 있다.
엔진 소리가 커지고, 기체가 활주로를 한참 벗어나 있다. 비행 중의 시간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도착도, 출발도 아니다. 이 상태에서 이 책은 가장 또렷해진다. 조명을 낮추자 기내가 조용해진다.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접는다. 나는 책을 손에 올려둔 채 가만히 둔다. 읽지 않는 독서, 이 책과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그러하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붙잡지도 않는다.
고도가 안정되자 밖은 어두워진다. 구름 위에서는 방향 감각이 느슨해진다. 도착지에 가까워질수록 기내는 분주해진다. 창문 덮개가 올라가고, 도시의 불빛이 정돈된다. 다른 질서, 바뀐 도시로 이동하지만 역시 그 문장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착륙 안내 방송을 한다. 한국어가 먼저 들린다. 해석할 필요 없는 발음이 비행기를 채운다. 바퀴가 땅에 닿는다. 짧은 충격, 기체가 속도를 줄인다. 사람들의 몸이 동시에 기운다. 책의 무게가 또렷해진다. 통로를 따라 걸어 나온다. 도착 게이트를 지나 공항의 냄새, 바닥의 색, 안내 방송의 속도, 전부 익숙하다. 그 익숙함이 곧 안정이 아니라서 문장을 손에 여전히 쥐고 있다. 판본은 달라도 홀든은 변하지 않는다. 여행이 끝났다기보다 중심이 거기에 있다는 확인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