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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한 지 1년이 되기 17일을 남겨놓고, 회사가 없어졌다. 생일이 하루 전이었다. 착잡한 마음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짐이라고는 옷 몇 벌과 노트북밖에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던 기차 밖의 풍경이 나를 서서히 세상에서 밀어냈다. 역에 내리자마자, 한때 매일같이 맡던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오래된 기억처럼 낯설었다. 역 앞 분식집에서는 여전히 어묵 국물이 끓고 있었고, 버스정류장에는 학교 가방을 멘 아이들이 돌아다녔다. 그들 사이를 지나쳐 집까지 걸어서 십오 분 남짓, 길가의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발밑에 부서지는 잎들의 향이 가득했다. 도시의 먼지 대신, 흙과 낙엽의 잔해가 코끝에 스며들었고, 그 속에는 잠시 잊고 지내던 시간들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마당에 들어서자 반가운 문소리가 났다. 현관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나를 보았다. 순간, 말이 끊긴 듯, 침묵이 흘렀다. 놀란 목소리 뒤로 아버지가 신문을 접으며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명절마다 바쁘다고 내려오지 못했던 내가, 아무 예고도 없이 문 앞에 서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깐 쉬러 왔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올렸고, 아버지는 다시 신문을 펼치셨다. 신문을 보는 눈길이 글자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제야 방 한쪽에 놓인 오래된 시계를 보았다. 떠날 때 그대로였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초침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마당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가 20년 넘게 쓰는 빗자루가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고, 흙먼지가 풍겼다. 익숙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간격이 생겨 버렸다. 오래 전의 나는 아직 이곳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서울의 화려했던 불빛들은 멀어졌고, 그 안에 두고 온 하루들은 나를 붙잡고 있었다. 출근길 사람들의 규칙적으로 흘리던 발소리와 바쁘게 깜빡이던 신호등은 새소리가 대신해 주었고, 분주하고 정확하게 지금도 자신의 자리들을 찾아 움직일 테지만 그 움직임에서 나는 비켜 있었다. 20년 넘게 살아왔던 방인데도 고작 몇 년 멀어졌다고, 방 안의 공기와 친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서로를 경계하며 아무 말 없는 무거운 저녁을 먹고 난 후 침대에 누웠다. 벌써 지쳤지만 잠은 오지 않아 연락처를 뒤적였다. 화면을 넘길 때마다 이름들이 스쳐갔다. 한때는 매일 같이 만나던 친구들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서로의 불평을 웃음으로 덮던 친구들, 비 오는 날에는 그냥 전화를 걸어오던 사람들, 그때는 그렇게 굳이 무슨 이유를 찾지 않아도 연결되어 있었다. 심지어 내 전화번호는 그대로였다. 그 숫자들 뒤의 사람들은 다른 시간 속을 걷고 있었다. 하나, 둘 번호를 눌러보았지만 몇몇은 받지 않았다. 단조로운 신호음이 귀만 간질이다 사라졌다. 그 소리가 어째서인지 어제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기억 속의 그들이 아닌, 지금의 그들이 있는 현실과 나는 거리가 있었다.
몇몇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걸겠다며 바쁘게 끊거나 통화는 10초를 넘기지 못했다. 편안하다고 생각한 말투였지만, 그 말 뒤에는 온기가 없었다. 정적이 흘렀다. 함께 웃던 얼굴들이 스쳤다. 그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만 이 현실이 어째서 이토록 쓸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지 망설이지 않았었다. 그땐 다들 비슷한 곳에 서 있었다. 불안과 꿈, 막연한 희망을 함께 나누던 시절,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하루를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결혼했고, 누군가는 이직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딘가로 떠났다. 그저 속도와 방향이 달랐을 뿐이다. 도시에서 버텨온 시간보다 더 낯선 것은 그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변해버린 관계들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로의 안부 대신, 일정표와 보고서로 대화를 대신했다. 목소리는 남았지만 마음의 거리만 늘어갔다.
돌아온 전화는 역시나 없었다. 전화가 끊긴 자리에서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은 어쩐지 유독 더 찌그러져 보였다. 창밖은 이미 저녁이었다. 햇살이 집 앞 골목길을 따라 길게 누워 버렸다. 그 빛 속에서 멈춰 섰다. 저녁 햇살이 창틀을 비스듬히 스쳤다. 빛의 결이 느리게 흘렀다. 돌아온 게 아니라, 단지 한때의 자리로 되돌려진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그때의 마음들은 사라져 버렸다. 핸드폰을 뒤집어놓았다. 방 안이 더 고요했다. 오래된 시계가 마지막 남은 시간을 세듯, 작지만 분명한 소리로 아직 여기에 있다고 돌아가고 있었다.
1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달력 위에 붉은 숫자가 하나 더 늘었다. 생일이었다. 휴대폰의 알림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무것도 켜지지 않은 화면 속에서, 생일을 맞았다. 며칠 전, 카카오 톡의 생일 알림을 꺼두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누가 내 생일을 기억하는지 궁금하지 않다고, 그냥 조용히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마음 반대 구석에서는 알림을 꺼야만, 누가 진짜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잔인한 실험을 했던 것이었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가늠하는 어리석지만 피할 수 없는 허영이었다. 한참 동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메시지가 오지 않는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갔다. 그 공백이 점점 두꺼워져, 나를 덮는 담요 같았다. 누군가의 축하가 없다는 사실보다,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깊게 파고들었다. 내가 자초한 자유는 차가웠다. 자정의 방 안은 정적에 가까웠고, 창문 밖에서 가끔씩 비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내 얼굴 위에서 미약하게 떨렸다.
아무도 모르는 날이지만, 내 이름만큼 오래된 그림자가 다시 길어지는 걸, 지켜보기 위해 평소 좋아하던 영화를 틀었다. 대사 대부분을 외울 정도로 편안하게 보고 싶어서 튼 영화였지만, 장면이 바뀔수록, 위로받고 싶은 마음조차 닿지 않은 거리감만 들었다. 배우들의 웃음은 과거의 빛처럼 멀리 있었고, 음악은 친숙했지만 내 심장은 그 리듬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 영화 속 인물들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구경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화면 위의 불빛이 어두워지자 눈꺼풀이 무거워져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은 없었다. 대신 희미한 새벽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잠결에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역시나 세상은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아침 일곱 시, 부엌 쪽에서 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평범한 말이 괜스레 기대하게 만들었다. 몸을 일으키며 시계를 봤다. 신문이 접힌 자리 위에 안경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니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그 자리가 따뜻했고 무심했다. 어머니는 평소처럼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국이 끓는 냄새가 났지만, 미역국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였다. 식탁에 앉자 어머니가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가방을 하나 들춰 메고 밖으로 나가셨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밥숟가락을 들었다. 국은 조금 식어 있었다. 그 따뜻하지 않은 온기가, 오히려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곧 겨울이 올 거라고 알리는 바람이 집을 두드렸고 햇살이 온 힘을 다해 부드럽게 번지고 있었다. 시간 멈춘 것도 아닌데, 마음이 따라가지 못했다. 한참 동안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집안을 훑어보았다. 누군가의 축하가 없다는 건, 어쩌면 세상에서 잠시 빠져나와도 괜찮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기대도, 의무도 없이 맞는 생일, 식탁 위에는 미역국 대신, 한가한 하루가 놓여 있었다.
2
배가 어느 정도 채워졌을 때, 아버지의 접힌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무심코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 내가 어제 떠나온 세계의 잔해가 놓여 있었다. 작게 접힌 기사 한 귀퉁이에 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장님의 도주, 이사라고 불리던 사장님 가족들의 횡령, 체납, 조사 중이라는 말들이 검은 잉크로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줄을 유독 눈에 띄어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임금 지급 불가. 직원 수 ○○명.
그 수치 안에 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몸에 닿았다. 얼마 전까지 그 숫자를 구성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늘 아침 신문 속에서 그 숫자는 나를 버리고 하나의 문장이 되어있었다. 잘못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빼앗긴 것처럼 억울했다. 이제 이 사건을 설명하는 일은 내가 아닌 글자들이 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 기사를 읽고 우리를 연민하거나 조롱하거나 혹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숟가락이 식탁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배가 부른 지 고픈지, 마음이 흔들리는지 아무것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신문을 접었다. 뉴스는 끝났지만 내 안의 사건은 말이 되지 못한 채 머물렀다.
집에 내려오기 전 회사에 들렸었다.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손과 목소리가 오가던 공간이었다. 지금은 낮 시간의 그림자만이 천장 가까이에 얇게 붙어 있었다. 굳이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지 않았다. 밝히지 않아도 될 것들이 있다고, 오늘만큼은 그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 싶었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철을 바라보다 손끝으로 표지를 쓸었다. 숨을 들이켜니 건조함이 혀끝에 걸렸다. 여기에는 밤을 새우며 수정했던 문장들이, 번복과 포기가 스며있었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이렇게 허망한 일일까,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노력이 종이 한 줌의 무게로 줄어드는 순간이었다. 붙박이 서랍을 열자 볼펜, 구겨진 영수증, 이름이 적힌 키 카드, 그리고 첫 출근 날 받은 메모가 나를 맞이했다.
좋은 항해가 되길.
그 문장은 장식품이 되었다. 사람들이 배처럼 묶여 있던 이곳에 진심으로 항해라는 것이 존재했는지,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고 있다고 믿었지만 각자의 배는 서로 다른 파도에 잠겨 있었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깥에서 먼 엔진 음이 느리게 시차를 두고 올라왔다. 언젠가 그 소리를 들으며 출근 준비를 서둘렀던 적이 있었다. 서늘해진 바람이 셔츠 깃을 스쳤다. 그 바람이 방 안의 먼지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것은 먼지뿐이었던 건지, 그간 쌓아 올려둔 계절들도 함께 흔들렸다.
문서 파쇄기에 종이 뭉치를 넣었다. 날카롭고 짧은 진동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파편이 되어 바스러지는 동안 내가 보낸 시간의 일부가 어딘가에서 절단되는 소리를 들었다. 욕망, 기대, 성취 같은 단어들이 가장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잃는 일은 항상 이렇게 소음에 섞여 지나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상자를 챙기다 동료들과 찍은 단체 사진이 끼워진 파일이 손에 걸렸다. 한 명씩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선명한데, 마음이 흐렸다. 누가 어떤 정치적 얘기를 했는지, 누가 회식 자리에서 울었는지, 누가 퇴사하겠다고 골백번 말했는지, 이제는 구분할 수 없었다. 곁에 있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지금은, 우리가 함께 일했던 날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 맞는지 의심까지 생겼다. 누가 말을 걸었고, 누구에게 웃어 보였는지 확인할 길이 사라졌다. 기억은 남지만, 증거는 이렇게 인멸되고 있었다.
빈 캐비닛 문을 닫자 금속이 둔탁하게 울렸다. 마지막 숨소리였다. 다시는 이 층에 올라오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떠나는 데에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며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차갑고 단단했다. 어쩌면, 세상 어디든 버티게 하는 것은 이런 감각 하나였는지 모르겠다. 말로 설명되지 않고 버티는 힘, 깨어진 자리에도 묵묵히 남아 있던 아이러니한 이어짐이 있었다. 출입문을 나서자 낮은 빛이 가로수의 결을 따라 퍼져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들고 있을 수 없어서 놓아버렸다. 한동안,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아무것도 손에 들고 있지 않은데 손가락이 저릿하게 기억하고 있는 감각, 그것만이 살아남았다.
서랍을 비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볼펜, 출퇴근 기록 카드, 사라진 줄 알았던 동전 몇 개, 이름이 적힌 보안 출입증이 내 손바닥에서 식어갔다. 그것들은 한 때 이곳에 있었다는 표식들이었다. 문득 단체 채팅 방 알림 숫자가 멈춰 있는 것을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계가 돌아가듯 끝없이 쏟아지던 대화창이었다. 새로운 프로젝트, 남은 마감, 불평, 악담, 간헐적인 농담으로 시끄러웠는데 부도가 발표된 그날 이후, 그 누구도 먼저 문을 열지 않았다.
다들 잘 지내요? 우리 나중에 봐요.
그 문장들은 마치 잠수함처럼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했다. 회사 건물을 나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로 걸었다. 가을 끝자락의 찬 공기가 피부를 찢어놓는 듯했다. 신호등 앞에서 멈추자, 멀리서 가로등 불빛이 잉크처럼 번져 흘러내렸다. 그 사이로 종이비행기가 굴러왔다. 누군가의 장난일까, 아니면 어떤 아이가 하늘에 띄워 보내려 했던 실패한 꿈이었을까? 잘 접혀진 종이를 폈는데 역시나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종이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 도로 끝으로 흩어졌다. 그 종이가 더 날아가지 못한 이유를 생각했다. 힘이 부족했는지, 바람이 모자랐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날 수 없는 모양이었는지, 그러면서 이 회사도, 내 지난 시간도, 나라는 사람도, 어쩌면 그런 종이 비행기였을지 모른다.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무 말도, 어떤 부름도 없었다. 알람을 꺼두었지만, 사실은 누군가 부르지 않기를 바랐던 것인지, 아니면 꺼져 있어도 나를 찾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던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사라진 내 직장이라고 불렸던 건물 불빛을 내 뒤로 밀어 넣었다.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을 뒤로 남겨둔 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도 잃은 채, 길 하나를 하염없이 걸었다.
3
식탁 위의 그릇을 포개며 어떤 잡념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씹히지 않은 감정이 목구멍에 걸렸지만, 식탁을 정리하는 일은 다음을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였다. 물기를 훔쳐낸 숟가락을 제자리에 놓고 불을 끄니, 정적이 맴도는 집인데도, 누가 막 다녀간 것 같은 어수선함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 바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 듯했지만, 내 심장만 혼자 굴절된 박자로 뛰고 있었다. 핸드폰이 유독 더 조용했다. 그 흔한 스팸 문자조차도 나를 찾지 않았다. 문자, 부재중 통화, 여러 단체방의 새 메시지, 어느 하나도 나를 향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계는 멀쩡히 작동하고 있는데, 세계가 접촉을 일시적으로 거둬갔다. 이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잊힌 이름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태연한 척 원래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 말이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노라 부르기에는 쪼그라든 감정이 가슴 안쪽에서 울었다. 내 생일을 아무렇지 않은 하루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실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다. 도망치듯 몸을 일으켰다. 신발을 신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말로 다 채울 수 없는 비명이 번졌다. 이 고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고요가 나를 벗어났으면 했다. 문을 닫고 길로 나섰을 때, 아침 공기는 감정 하나 건드리지 않은 얼굴로 내 앞을 펼치고 있었다. 뺨을 스치는 공기는 자꾸만 어제를 떠올리게 했고, 그 기억 속에서 초라하게 서 있는 나를 보았다.
그래서 걸었다. 걷는 동안, 어깨는 자꾸만 오므라들었다. 어디선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저 사람들은 각자의 하루를 살고 있었을 텐데, 그 속을 통과하며 실패자처럼 느껴버렸다. 아니, 실패했다는 언어조차 과분해, 그저,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나를 믿었던 누군가에게 미안한 사람이 되었다. 걸음이 깊어질수록, 울만큼의 힘도 남지 않았기에 울 수조차도 없었다. 걷는 것으로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처럼 멈추지 않고 걸었다. 길 위에는 어떤 목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햇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땅바닥을 밟고 있었고, 그 사이를 별생각 없이 지났다.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고, 무엇도 나를 머물게 하지 않았기에 내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모양새로 펼쳐져 있었다.
왜 이렇게 걷고 있는가?
명확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았다. 걷는 동안만은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저 멀리서 고양이 한 마리가 풀 속을 가로질렀다. 그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단단한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왜 저런 확신이 없었을까.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 가야 할 곳이 존재하는지, 그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핸드폰을 확인하려다 멈췄다. 확인한다고 달라질 것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생일인 오늘, 단 한 줄의 말도 닿지 않은 이 상태는 어쩌면 고장 나버린 장면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정돼 있던 구성인지 모른다. 인간관계들이 어떤 질감으로 존재했는지 낯선 방식으로 짐작하기 시작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람이, 어떤 의미도 얹지 못한 채 그저 지나가는데 드러내지 못한 말, 끝내 묻어둔 마음,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흘러가버린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구원 같은 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억울할 만큼 잘 알고 있었기에 걸음을 옮기는 일만큼은 덜 아프게 했다.
4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걸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특별할 것 없는 골목이었다. 가게 간판들이 켜지고 있었고, 저마다의 저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문을 향했다. 그들과 속도를 맞추지 않았다. 나만의 박자도 없었지만 굳이 만들어야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인생에 배경음악이 있다면, 지금 흐르고 있을 곡은 어떤 부분일까. 도입부도, 절정도 아닌, 단지 악보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그 사이, 아니면 소리가 나지 않는 음표들이 길게 이어지는 구간 그쯤에 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흔히 힘든 시기도 지나고 나면 그 자체가 귀한 시간이더라고, 고난도 하나의 재료가 되고, 상처도 언젠가 결이 된다고 말하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쉽지 않다. 차라리, 다른 어느 날이었으면 그러려니 수긍이라도 했을 수도 있는데, 하필 오늘인 이유가 있었을까. 심지어 생일인데. 평소에는 생일을 잊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누군가라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이 두 마음이 서로 닿지 않는 선을 그리며 등지고 있었다. 빈 잔을 손에 쥔 것처럼 헛헛하게 그 틈이 아려왔다. 어둠의 온도는 더디게 내려앉았고, 내 하루가 종이 위에서 말라갔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여력조차 생기지 않았다. 목적은 아니었다. 그저, 멈출 수 없었을 뿐이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숨을 고르지 않고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상태도 언젠가 이해하게 될 한 장면이라면, 이 고르지 못한 호흡 또한 기록의 일부가 될 거라고만 여겼다. 문을 열었다. 문을 닫는 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바깥의 어둠보다 더 어두운 정적이 가라앉았다. 신발을 벗다 말고 멈칫했다. 무너질 만한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뒤에서 등을 두드려줄 사람이 있다면 주저 없이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이 집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텅 빈 방은 어떤 위로나 조언보다 엄격한 침묵을 자리하고 있었다.
눈물의 문턱에서 돌아서는 일이 울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으려다가 손가락이 굳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제스처처럼 보일까 두려웠다. 그래서 천천히, 가방을 내려놓았다.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눕는다는 행위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등이 이불을 만나는 그 순간, 이 하루의 무게가 어깨뼈 사이에서 금이 가듯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숨을 들이켜고, 들킬까 봐 숨을 내쉬는 속도를 늦췄다. 울음이 목의 어딘가에서 심장 가까이까지 차오르는 것을 밀어내야 했다.
5
핸드폰은 결국 울리지 않았다. 오늘의 날짜를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 적막함이 세상의 악의도 아니고, 누군가의 실수도 아니었다. 그저 삶의 어떤 결이 오늘,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이토록 깊숙이 파고들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생일을 잊고 싶었지만 무표정한 화면이 잊히는 쪽이 바로 나일 수도 있음을 잔인하게 가르쳐주었다. 창문을 열었을 때, 멀리 국도를 따라 이어진 불빛들이 서로의 온기를 모으지 못한 채 흐트러져 있었다. 도시는 거기 있었지만 어딘가 이 자리에서 침전되고, 더 머물러 있다가는 숨이 눌려 굳어버릴 것 같아서 고향집이 돌아온 곳이기는 하나, 버틸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가방을 들었다. 도망이 아니라, 버티기 위해 이 선택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해받기 위해 필요한 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지금, 다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쪽을 택했다. 머무르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해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제각각의 거리감을 품고 있는 바깥 풍경들을 보고 있으니 적어도 그 불빛 속에서는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이 생일이라는 사실이 덜 잔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깊지 않은 소리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버스가 움직이는 리듬에 맞춰 음악을 틀었다. 드라마틱한 곡들이 오늘따라 많이 내 마음을 건드렸지만 그 어느 노래도 거대한 전환점처럼 울리지는 않았다. 작은 선율이 한 사람의 삶을 간신히 지탱하는 실처럼 들리면 하는 바람이 마음 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내 인생이 위대한 교향곡이길 바란 적이 있었을까? 그저 어둡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휴식일 정도의 등불이 배경에 남아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런 바람조차 지나치게 큰 기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무너지는 날에도 장엄하고 찬란한 음악이 자신을 위로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힘을 가진 적이 거의 없기에 오히려 미완성인 음표들이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는 음악을 가까이에서 들었다. 끝맺지 못한 문장들,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 어딘가 빠져 있는 리듬. 그것이야말로 내 삶의 소리와 비슷했다.
나를 흐릿하게 비추는 창문을 만졌다. 유리 너머로 멀어지는 지방 도시의 불빛은 누군가의 희망일 수도, 또는 포기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그 의미를 감당할 힘이 없어서 볼륨을 줄였다. 밝지도, 지나치게 캄캄하지도 않은 음색, 내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정도의 소리, 그 바람이 이렇게 소심하고, 이토록 간절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버스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향해 나아갔고, 오래된 필름을 돌려보듯 앞으로 날들을 상상했다. 누구도 박수치지 않고,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장면들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게 전부였다. 아마 거기까지가,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희망의 양이었다.
6
정류장은 깊은 밤에도 꺼지지 않았다. 긴 호흡의 끝에서 겨우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숨을 들이마셨다. 도시가 나를 기다려주는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불완전한 음들이 이어졌고, 그것만으로 버틸 수 있었다. 집까지 이어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냉기 속에서 멈추지 않고 걸었다. 오늘 하루,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심장은 묻고 또 물었다. 이 삶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지, 아니면 걸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대신 걷고 있는 내가 있었다. 어둠 위로 창문에 걸린 불빛들이 서로의 빛을 나누고 있었다. 눈부시지 않았고, 찬란하지도 않았지만 부서지지 않은 채 따라왔다. 언젠가 사계가 다시 열리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지금의 어둠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불안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걸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 오늘의 마지막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도 서툴고 미완성이었지만, 음들은 이미 다음 박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내 생일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