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의 일이다. 새벽에 부모님 집으로 내려오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뭔가 큰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래도 오늘은 마트에 가서 장을 봐야겠다고 하신다. 운전을 그만 두신 두 분이 장을 보기 위해 차가 필요하신 모양이었다. 그동안 외출을 삼가고 집에만 계시니 생필품도 떨어지고 또 외출도 하고 싶으신 게 보다.
나는 전화기에 대고, 부모님을 모시고 대형 마트에 다녀오는 것보다는 쇼핑 목록을 문자로 보내달라고 말씀드렸다. 요즘 같은 때에는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대형 창고 마트에서 내가 직접 장을 봐서 물건을 전해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80세 이상의 어른에게 더 치명적일 수 있다는 뉴스 기사가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있는 대형 창고 마트인 E-mart 트레이더스는 위례 스타필드에 속해 있는 대형 창고 마트다. 월요일에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다녀가는 바람에 전체 휴관을 하고 방역 작업 후에 오늘 다시 개장한 것이다. E-mart 트레이더스는 자주 다니는 매장은 아니었지만, 오늘 아침 매장에서의 풍경은 아주 생소했다.
내가 기억하는 보통의 대형 마트 장보기의 모습은 단거리 경주와 같았다. 주차장에서부터 자리 찾기 경주가 시작되어, 카트 뽑기, 제품 담기, 계산하기 등 일련의 모든 과정이 단거리 경주를 닮았다. 물건 포장 마친 후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장 내에 있는 식사 코너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울 정도로 음식이 푸짐하고 저렴했다.
매장을 찾은 손님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주로 콩과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좋은 서비스 모습이다. 그런데 손님들은 다 먹지도 못할 엄청난 크기의 음식을 구입하고, 또 엄청난 음식을 남기고 버린다. 대량 생산 - 대량 소비 - 대량 폐기의 현장에 와있는 셈이다. 쇼핑할 때 느끼지는 못했던 미국식 자본주의의 전형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대형 매장 내 식당 코너이다.
엄청나게 큰 피자 한 판을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실상은 급하게 연료를 채우고 삶의 경주 현장으로 다시 뛰어들라고 부추기는 장치에 불과하다. 창고형 매장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야 합니다. 빨리 싸게 많이 사서 풍족하게 쓰고, 남는 것은 그냥 버려주세요.
명확한 브랜드 체험의 공간 그 자체이다. 오늘 아침 E-mart 트레이더스 매장의 모습이 생소했던 이유는 그 메시지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매장을 찾은 손님은 몇 안되었고, 카트를 끌고 경주를 할 이유도 없었다. 매장 내의 커다란 전광판에는 블랙핑크가 새로 나온 샴푸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급하게 서둘러서 구매하라는 메시지 같지는 않았다. 창고형 매장이 이렇게 조용한 공간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엉뚱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조용하게 천천히 살 수도 있었는 데 그동안에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경쟁적으로 살아왔지? 코로나 사태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잠시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사회 전반적으로 천천히 돌아간다. 사회적 격리를 예절이라 생각하며, 사회적 거리를 두다 보니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다 보니, 경제 활동도 덜하게 되고, 소비 활동도 더 위축됐다. 뉴스에서는 자영업자가 어렵다고 한다. 월세를 내기 어려운 지경이다라고 말이다. 월세를 내지 못하면 건물주가 위태로워지겠고, 건물주가 위태로워지면? 도대체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야기된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대량 생산 - 대량 소비 - 대량 폐기의 순환고리가 약해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렇게 경쟁적이지 않은 삶에서 삶의 질에 대해 경험해 볼 수 있는 조그마한 틈새가 된다.
어제저녁 식사 시간 이후에 가족 모두가 모여 노래를 불렀다. 오랫만이다. TV에 노래방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어제 처음 알았다. 딸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으니 집에서 얼굴 볼 일이 더 많이 생겼다. 가족이 모두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도 늘었다. 밥도 함께 먹는 일도 많아졌다. 아이가 집에서 라면을 끓이는 일도 많아졌다. 아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수학 학원에서 중 1에게 중 3 수학을 선행 학습시킨다는 것도 어제 알았다. 수학을 선행한다고 수학을 잘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이렇게 선행하는 삶이 피곤한 것은 당연하다.
학원에 가지 않으니 아이들은 행복하다. 그냥 온전히 집에만 있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보는 것에도 지쳐 이제는 거실에 나와 노래도 부른다. 가족을 위해 조그마한 시간을 만들고 있다. 작은 행복이다.
그동안에는 너무 바빠서 우리 곁에 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 엄마는 경쟁에서 뒤처진다고 난리다. 학원에 빨리 보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은 소중하다. 우리가 이렇게 바쁘지 않게 살아도 삶은 살아진다는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다. 이렇게 살아도 삶 속에서 행복은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