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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백일 Dec 20. 2020

[서평]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운명에 처절하게 맞서고 깨어질 만큼 순수하고 아픈 것이 바로 청춘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노르웨이의 숲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7년에 쓴 청춘 연예 소설이다. 어쩔 수 없이 삼각관계에 빠진 주인공 와타나베의 일상 연예 이야기를 통하여 신의 영역에 도전할 만큼 무모한 젊은 날의 정열과 실망, 낙담 그리고 순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별 볼 것이 없는 평범한 젊은 청년이 와타나베다. 그리고 이야기는 와타나베가 문득 사립대학의 기숙사에 혼자 살게 되는 장면을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와타나베는 보통의 젊은이들이 그러듯이 처절하게 고독하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정작 평범하게는 살 수는 없다. 숨겨야 하는 특별한 가족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기에, 어떤 일에도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와타나베에게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하면서 흠모하던 나오코가 등장하고, 와타나베의 인생은 평범해질 수 없었다.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이미 가즈키를 통하여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 한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 가즈키와 나오코는 어릴 적부터 연인관계였지만, 데이트할 때면 언제나 와타나베를 불러 함께 놀았다. 고등학생이었던 가즈키가 갑자기 자살을 하게 되고, 나오코에게도 와타나베에게도 가즈키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둘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나오코는 점차 와타나베를 의지하게 되고, 와타나베도 청춘의 모든 것을 걸고 나오코를 순수하게 지키고 싶어 한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와타나베에게 나타나 그의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고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요양원으로 가버린 나오코가 젊은 와타나베에게는 너무나 버겁다. 와타나베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편지를 쓰는 일과 그녀의 모든 아픔, 슬픔, 기쁨, 떨림, 숨소리, 그리고 두려움을 사랑하는 일밖에 없었다. 모든 청춘이 그러하듯이, 순수하게 운명에 맞서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  


와타나베는 자살한 가즈키에 대한 죄책감이 있는 상태에서 나오코를 만났고, 그래서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어 했고, 그것이 친구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일이라 믿었다. 나오코도 가즈키에 대한 미안함이 그녀를 와타나베로 이끌었다. 그런 두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만났고, 상처가 있는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사랑의 힘으로 힘든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오코는 자기의 인생에 누구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멀리 요양원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37살이나 돼서야 와타나베는 말한다. "슬프다.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다"라고. 청춘일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인생의 진리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순수하게 찬란했던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려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 내가 노력하면 다른 사람의 인생도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 운명에 도전하고 불가항력 같은 것은 믿지 않는 것. 그러한 것들이 모여 순수를 만들어낸다. 유학시절 내가 살던 기숙사에도 첫사랑은 가십과 함께 찾아왔고, 나의 모든 것으로 그녀를 아름답게 하고자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나의 노력만으로 결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 소설에서는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인 레이코의 인생 이야기를 통하여 현실의 한계를 절실히 보여준다. 레이코 본인도 본인의 문제로 남편과 아이와의 이별을 선택하고 사는 사람이지만, 레이코는 나오코와 함께 요양원 생활을 하며, 나오코의 어두운 자아를 밝은 현실로 끌어내려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나오코가 자살을 선택하자, 낙담하는 와타나베에게 레이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행복해야 한다고. 살아있는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고. 순수하기만 했던 와타나베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와타나베는 스스로 행복하기로 선택한다.


와타나베가 선택한 행복의 끝자락에 미도리가 있었다. 진솔하고 거침없는 미도리는 세상의 모든 가식을 벗어던지고 제약 없이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언제나 자기감정에 솔직하여 자신을 가감 없이 받아줄 사람이 이 세상에 와타나베밖에 없다고 믿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인생은 혼자라는 것을 처절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외롭고 두려울 때 한껏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와타나베가 순수하게 지켜오던 사랑이라는 신념의 배신 때문에 낙담하고 있을 때 손을 내밀어 주는 바로 그런 존재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다. 미도리도 한참 불완전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순수함을 지키려고 하는 완벽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선택지는 '자살'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완벽한 인물들은 모두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본 인생의 행복은 무엇일까? 불완전한 인물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 다른 사람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것.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 내에서 '순수함'을 극복해 나가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 이런 것들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에게도 사람과 세상에 대한 순수함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의 또 다른 이름은 상실의 시대다. 모든 순수함을 상실해버린 지금의 나에게 순수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순수했을 때의 꿈과 지금의 꿈은 사뭇 다르다. 순수했을 때의 꿈은 세상을 바꾸는 꿈이었다면, 지금의 꿈은 직장에서의 생존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다른 사람에게 내 울타리를 내어주는 것은 순수한 시절에는 생각도 못한 방식이었다. 내 울타리를 내어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모를 때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울타리로 포용하려고만 했지 내어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망도 그만큼 컸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내 울타리를 내어주는 방식은 내가 쪼글어드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확장되는 방법이란 것을 안다. 순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현명하기 때문에 지금은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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