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이 가잖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 그러니까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찬 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쯤이면 잔기침을 시작하곤 했다. 최근 몇 년간 뜸했다가 올 가을 다시 잔기침이 찾아왔다.
예전엔 왜 이렇게 기침을 하냐고 물어보면 이 기침이 내 복근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역시 복근은 여름 복근보다 가을 복근이라고. 그러면서 움푹 파인 가을 복근 사이에 혼자 손가락을 끼어보곤 했다.
올해도 누군가 묻는다.
"감기 걸렸어?"
“감기 아니고, 알러지야."
"무슨 알러지?"
"외로움 알러지. 이거 감염돼. 외로움 바이러스.(아련한 눈빛) ”
농담처럼 말을 내뱉곤, 올해 기침이 더 잦은 걸 보니 외로움이 더 짙어질 게 틀림없다고 진담처럼 생각한다. 늘 가을과 잔기침과 외로움은 그렇게 엮여있다.
이번 가을은 유독 가을이 가을 같았는데, 이번 가을을 좀 더 밀도 있게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뭔지 모를 우울감이 동반되어서일 텐데 그 뭔지가 모를 일이다. 내가 우울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아주 잠시 우울에 빠졌다가 그 이후엔 우울에 관련된 모든 것을 차단하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에 몰입을 굉장히 잘하는 반면 또 어딘가에 매몰되면 빠져나오는 것 또한 힘들어한다. 그래서 난 무언가에 빠지는 것을 늘 경계한다. 조심성이 대단한 남자다.
영화 조커가 개봉했다. 주위의 평이 좋았는데 다들 영화가 주는 우울의 잔상이 깊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 지금 내가 피해야 할 영화이구나.'
그러나 일요일 저녁, 나는 작은 일탈을 하고 싶어 졌고 그 선택으로 영화 조커를 보기로 했다. 영화 조커는 우울하지 않았다. 혼자 영화를 보고 있는 내가 더 우울했다. 그의 우울에 나의 우울이 이겼다. 뜻밖의 성취감을 안고 극장을 나섰다.
오늘 나는 ¹글렌 체크 코트를 꺼내어 입었다.
외출 전 ‘바게트를 사러 갈 때도 왜 예쁘게 치장을 하느냐’는 질문에 ‘빵을 사러 나선 길에 첫사랑을 만날 수도 있고, 누군가가 나를 보고 휘파람을 불어줄 수도 있다’라는 한 파리지앵의 인터뷰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 내게 무슨 일어날지 어떻게 알아?' 그러나 나는 첫사랑을 만나지도 않았고, 어느 누구도 내게 휘파람을 불어주지 않았다.
휘파람 대신 에어팟을 귀에 꼽고 노래를 듣기로 했다. 밤바람이 제법 매서워 코트의 깃을 세우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굴렸다. 뒷자리가 허전하니 자전거가 더 쌩쌩 달려 밤바람이 내 얼굴을 더 차게 때렸다. 그렇게 한참을 때려 맞으며 정신이 혼미 해질 때쯤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친구 "오빠 조커 재밌었어?"
나 "응. 근데 조커 안 우울하던데?"
친구 "그래? 조커가 불쌍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 그런 복잡스러운 느낌 들었는뎅."
나 "응. 그냥 재밌긴 했어. 내 인생이 우울해서 조커가 안 우울함 ㅋㅋ 사운드 트랙이 정말 좋더라."
친구 "그치 맞앙 나두 음악 좋다 생각했어, 근데 보는데 안 힘들었어? 난 아서 플렉이 총 갖는 순간부터 계속 힘들었어 ㅋㅋ"
나 "응 불편하고 긴장되는 건 있었는데 그렇게까진 안 힘들더라고. 가을이라 영화 보고 나오는데 음악 들으니까 좋다."
친구 "무슨 음악 들어?"
나 "신승훈 노래 ㅋㅋㅋ"
친구 "네? 신승훈이요? ㅋㅋㅋㅋㅋ"
나 "ㅋㅋㅋ"
친구 "의식의 흐름 뭔데 ㅋㅋㅋㅋ"
나 "오랜만에 그냥 한번 들어보고 싶었어."
친구 "² 조커둥절ㅋㅋㅋ"
조커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친 호아킨 피닉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영화 조커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신승훈 노래를 들었다. 조커가 춤췄던 뉴욕 브롱크스 167번가, 그 계단의 잔상을 신승훈은 단숨에 서교동의 밤거리로 바꿔버렸다. 역시 국민가수다. 단번에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보이지 않는 사랑이 된 느낌이다. 에어팟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가 이 공간을 완벽히 정복했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조커는 없고 신승훈이 있던 가을밤이었다.
주석
¹유주얼에딧 제품, 50% 할인 중
²조커가 어리둥절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