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시기라 힘들었어요.
최근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 때문에 청소년들의 학폭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나는 드라마 속 장면들이 너무 끔찍하고 잔인한 데다 현실감 없이 과장되게 그려져 썩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곽경택 감독의 '친구'나 배우 정우가 열연한 '바람'이란 영화가 훨씬 와닿는다.
특히 영화 '친구'는 감독이 내 또래인 데다 배경도 부산이라 마치 나의 학창 시절을 보는 듯했다.
당시 우리 학교 일진들 중에는 유오성 분의 준식이처럼 나서지 않고 조용한 실세 짱이 있었고, 장동건 분의 동수 같은 무서운 행동 대장도 있었다.
또 짱만 믿고 까불며 으스대는 얄미운 놈도 있었으며, 모범생이면서 일진들과 어울리는 상택이 역에서는 예전 나의 모습이 투영되기도 했다.
영화의 여러 에피소드들은 실제 내가 보고 겪은 사건들과 비슷한 것들이 많았는데 특히 동수가 복도를 지나며 창문들을 다 깨뜨리는 장면은 실제로 우리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다만 나의 경우 인문계였던 고등학생 시절보다 물불 안 가리고 무서울 게 없는 중학생 시절이 더 영화와 비슷했다.
변성기를 맞아 2차 성징이 나타나면서 아이에서 어른으로 몸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는 시기가 바로 중학생 때이다.
개인차가 있어서 아직 애기같은 꼬마와 어른 같은 시커면 친구들이 한 반에 동급생으로 존재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갑자기 어른이 된 듯한 친구들은 또래의 꼬마들이 가소롭게 보여 어른 행세를 하려 든다.
그래서 당시 일진들은 시시하게 같은 반의 조무래기들을 괴롭히거나 같이 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술에 취해 조용히 잠만 자고 학교 밖에서 저들끼리 담배 피우고 술 마시며 놀거나 타 학교 일진들 간에 패싸움을 하면서 사고를 치고 다녔다.
당시 이들을 학교에서 품지 못하고 밖으로 내몰아 폭력 학생이 되도록 하는 데는 "너그 아부지 뭐 하시노."같은 폭력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같은 학교 학생들을 보호하려는 나름 의리 같은 게 있어서 특히 영화관 단체 관람 때 패싸움이 흔했다.
질풍노도의 중학생 시절은 누구나 학폭의 피해자가 되는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일진들 앞에서는 두려움과 비겁함 속에 묵인과 방관을 하지만, 나름 조무래기들 사이에도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일들이 흔했다.
그런 천둥벌거숭이들의 혈기를 통제하기 위해 일본 군국주의 제복 같은 검은 교복을 입혔고 선생님들은 대걸레 자루로 매를 만들어 '빠따'를 쳤다.
중3 때 그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반장이 된 나는 이런 무시무시한 애들을 통솔해야만 했다. 담임은 정년을 앞둔 할아버지 선생님이라 만사가 귀찮은 듯 모든 학급 일을 반장에게 일임시켰다.
아침 자습 출제, 문제 풀이, 청소 검사, 심지어 수업 시간에 칠판에 판서조차 내게 시켰다.
할아버지 선생님은 힘도 부치시는지 학생들 '빠따'치는 체벌도 내게 시켰다.
아무리 반장이라지만 친구를 몽둥이로 내려쳐야 했으니 본의 아닌 학폭 가해자가 된 것이다.
당시 나에게 매질을 당한 친구들에게 이제라도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반장이란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양쪽으로부터 다 원망을 들어야 하는 괴로운 자리였다.
게다가 '유오성' '장동건'이 다 우리 반이었다.
그 짱과 부짱들도 자습 검사를 할 때 다른 친구들과 공평하게 '빠따'를 쳐야 하는데 이게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그때 우리 반에 영화엔 없던 특이한 캐릭터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임채웅이라는 친구다.
당시 우리 학교는 씨름부가 유명해서 덩치 크고 힘센 일진들은 여기에 다 모여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크고 힘이 셌던 이 친구가 씨름부 주장이었다.
운동과 큰 덩치 때문에 일진들과 어쩔 수없이 어울리고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받았지만 어긋난 행동을 스스로 자책하고 괴로워하던 마음 여린 친구였다.
어느 날 그들과 어울렸는지 술이 거나해져서는 우리 집에 찾아와 대문 앞 계단에서 나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친구를 도닥이며 위로했지만 나도 답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날 그 친구는 우리 아버지께 무릎 꿇고 앉아 인생 상담을 받고 갔다.
그 후로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서 아버지께 깍듯이 인사도 드리며 나랑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가 나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어떤 일진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 오히려 상택이처럼 그들과 그럭저럭 잘 지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운동에 전념해 나중에 특기생으로 대학도 갔고 당시 한창 인기 있던 민속씨름대회에서 두 번이나 금강장사를 차지했다.
우리 아버지께서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나는 아이 셋 다 학폭 사례를 겪은 기억이 없다.
딸들은 고등학교부터 미국에서 유학했고 장애가 있는 막내아들은 일반 고등학교에서 통합 교육을 받았는데, 친구들 모두 잘 대해주었고 특히 반장은 수호천사를 자처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십여 년 전 남녀 공학 중학교에 출장 검진을 갔을 때가 기억난다.
여전히 망둥이들처럼 날뛰는 건 마찬가지였는데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남학생 위에 올라타고 앉아 "너 이 새끼 죽을래?"하니까 남학생이 "항복. 항복. 살려줘"하는 귀여운 학폭(?)을 봤다.
밝고 씩씩하게 크는 아이들의 모습에 안도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고 다 일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행세깨나 한다는 부모를 둔 아이들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오히려 애들보다 어른들의 가학적 위계의식이 아이들에게 투영되고 교권의 추락에 의한 방임이 폭력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것 같다.
갑자기 어른 몸이 되어 잠시 혼란스러울 수는 있어도 역시 아이들에겐 순진하고 착한 천사의 영혼이 있음을 믿고 있다.
학폭을 방지할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겠지만 우리 아버지같이 어른들의 따스한 관심과 사랑이 더 필요하다.
미디어에서도 너무 자극적이고 폭력적으로 학폭을 과장하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