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법도 미리 배워야 둬야 합니다.
작년 가을 방콕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작은 딸이 각종 예약과 일정을 짜고 유창한 영어로 가이드 역할을 해준 덕분에 신경 쓸 일 없는 편안한 여행이었다.
호텔 수영장에서 호캉스를 즐기고 왕궁과 사원을 비롯해 야시장 등 핫플들을 찾으며 가족들과 추억을 쌓은 귀한 시간이었다.
유람선을 타고 방콕의 야경을 감상하는 선셋크루즈도 인상적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가르며 선상에서 뷔페식을 즐기고 가수와 악단의 공연을 감상하는 럭셔리 관광이다.
여흥이 점차 무르익자 가수가 승객들을 무대로 이끌어낸다.
가까이 있던 우리 아들이 가수랑 눈이 마주쳐 가장 먼저 나가서 어색하게 춤을 춘다.
몸치인데다 춤을 배워 본 적도 없어 머쓱한 '깨춤(깨 볶을 때 톡톡 튀듯 제멋대로 추는 춤)'을 열심히 추는 게 참으로 안타까워 못 봐주겠다.
쭈뼛하던 사람들도 삼삼오오 나와서 추는데 뭐 크게 다르지 않다.
술까지 취해서 비틀거리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짜증도 난다.
어떻게 동양인들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저렇게 놀 줄을 모르나 싶다.
30년 전 신혼 때 친한 동기 치과원장 부부들과 인도네시아 발리의 클럽메드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클럽메드가 프랑스 회사인지라 당시만 해도 유럽 등 서양인들이 대부분이었고 동양인 관광객들은 드물었다.
리조트 내 각종 액티비티와 강습 프로그램들이 다 무료였다.
고작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휴가였던 우리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그 많은 프로그램들을 시간 단위로 일일이 참여하느라 바빴다.
골프, 스쿼시, 스노클링, 심지어 양궁까지.
적도의 뙤약볕 아래 야외에서 테니스를 치는 건 우리 뿐이었다.
그러고도 밤엔 파티까지 즐기며 파김치가 되어 곯아떨어졌다.
마치 노동을 하듯 놀았으니 이것도 다 젊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었지 싶다.
프랑스인들은 한 달씩 장기 휴가를 보내니까 그저 수영장 썬베드에서 책이나 보다가 낮잠을 즐기고 더우면 수영을 하거나 시원한 야자수나 마시면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리조트 내의 나이트클럽에서 국제 커플 댄스 경연대회가 열렸다.
한국 대표로 우리 일행 중 한 부부가 출전했다.
커플 댄스임에도 서로 눈도 한 번 안 마주치고 고고인지 디스코인지 각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참으로 열심히 '깨춤'을 추었다.
워낙 열성적인 춤인지라 많은 박수와 함께 3등인가 4등인가를 했다.
셔츠의 단추를 반쯤 풀어 젖힌 호주에서 온 백발의 서양 할아버지와 아름다운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젊은 서양 여인(딸이었다고 굳게 믿고 싶다) 커플이 탱고를 멋지게 춰서 1등을 차지했다.
우아하면서도 편안한 호흡으로 젊은 여성을 밀었다 당기고 돌렸다가 꺾으며 리드하는 환상적인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서양인들은 아마도 학교에서 기본적인 춤동작을 배우나 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도 마리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발코니에서 춤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꼬마 신사와 춤을 추는 도중 아빠인 폰 트랩 대령이 몰래 교대해 마리아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는 알파치노가 아름다운 젊은 여성 도나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탱고를 추는 장면이 유명하다.
실수할까봐 두렵다는 도나에게 알파치노는 "실수를 하면 스텝이 엉기는 거고, 그게 바로 탱고죠."라고 말한다.
알파치노는 시각 장애인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탱고를 처음 춘다는 도나를 편안하게 리드하며 능숙하게 춤을 춘다.
확실히 탱고는 젊은 남자보다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의 조합이 멋져 보인다.(나만 그런가?)
일본 영화 '쉘위 댄스'도 있다.
평범한 셀러리맨인 주인공 스기야마는 직장 생활의 무력감을 우연히 들린 댄스학원에서 춤을 추며 극복한다.
아내는 남편의 불륜을 의심하지만 주인공은 여성 파트너보다는 춤 자체의 매력에 빠져든다.
아무래도 동양에서는 남녀가 함께 추는 서양식 댄스를 고운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시절에 주부들의 춤바람도 철퇴를 맞고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진정 춤 자체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겐 억울한 일이었을 거다.
나도 젊었을 때는 춤 꽤나 췄었다.
나의 춤은 놀랍게도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춤바람 난 여편네'였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어머니께 배운 춤은 지루박, 차차차가 아닌 디스코였다.
기본적인 팔동작과 삼각스텝을 익히고 적절히 섞어서 응용을 하면 웬만한 디스코 음악엔 멋지게 출 수가 있었다.
덕분에 대학에서는 써클(동아리) 신입생들 중 발군의 댄스 실력으로 동기들의 주목을 받게된다.
단과대학 축제인 '치향제'에서 신입생 장기자랑으로 우리 팀이 '허슬'이란 꼭짓점 댄스를 선보였는데 당연히 꼭짓점은 나였다.
이러한 나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큰딸은 미국 유학시절 K-pop 댄스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지금의 신랑을 만났다.
중국계 미국인인 사위는 중국보다 한국의 문화와 K-pop을 동경해 왔는데 마침 귀엽고 춤 잘 추는 한국 여자애를 만나 춤과 함께 사랑을 키워왔단다.
작은 딸은 아예 '클로리스'란 걸그룹에서 '나나'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했다.
명멸하는 숱한 보이. 걸그룹 중 하나로 빛도 못 보고 고생만 하다가 활동을 접었지만 'Friday Night'란 노래로 한 때 화려한 조명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우리 딸들의 연예인 기질은 나에게 물려받았으니 결국은 저희들 할머니의 '끼'가 면면이 이어진 것이리라.
같은 성당에 다니는 몇몇 친한 교우 부부들로 오랫동안 계 모임을 하고 있다.
언젠가 은퇴를 하면 다들 호화 유람선으로 세계 여행을 하고자 하는 공통의 꿈이 있다.
그래서 이름도 '크루즈 모임'이다.
몇 년째 매달 일정 금액을 붓고 있는데 모임 때마다 먹고 마시느라 모인 돈이 별로 없다.
하지만 돈뿐만 아니라 크루즈 여행을 제대로 준비하려면 노는 법도 미리 배워 놓아야 한다.
몇 달씩 망망대해에서 바다를 떠 다닐 텐데 매일 밤 선상 파티에서 남들 춤추고 노는 것을 마냥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다음번 크루즈 모임에서 진지하게 한번 제안해 봐야겠다.
"쉘위 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