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자들이여, 차라리 쉐프가 되자.

마이 얻어 뭇따 아이가

by 허용수

우리 집 아침 식단은 지중해식인지 이태리식인지 몰라도 하여간 서양식이다.

로메인 상추와 치커리, 파프리카, 양배추 등 각종 서양 채소와 블루베리, 바나나, 오렌지 같은 수입 과일에 바질 분말을 섞은 올리브유를 듬뿍 치고 발사믹과 우스타소스를 뿌려 샐러드로 먹는다. 빵에는 이름도 생소한 카이막, 이즈니 버터, 마스카포네 치즈, 클로티드 크림을 쨈과 함께 발라먹는데 내 눈에는 다 허연 덩어리들이 그게 그것 같고 그 맛이 그 맛인 것 같다.

휴일에는 여기에 소시지와 수프를 추가해 여유로운 아점을 먹는다.

엎어치나 메치나, 백마 히프나 흰말 궁둥이나 다 같은 말인데도 아내는 굳이 아점을 브런치란다.

어쨌거나 향긋한 아메리카노를 곁들여 신선한 건강식으로 우아하게 아침을 먹는다.

반면에 시골 출신인 막내 동서는 지금도 아침에 밥과 국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한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처가에서 장모님의 진두지휘 아래 김장을 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생굴을 잔뜩 넣은 김치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수육과 곁들여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님이 올해부터는 김장을 안 하겠단다.

김치를 워낙 안 먹어서 금방 시어지는데 그럴 바엔 필요할 때마다 신선한 김치를 사 먹는 게 낫단다.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예전처럼 집에서 메주를 띄워 된장과 간장을 만들지 않고 사 먹게 되듯이 이젠 김치도 집에서 담그지 않고 사 먹어야하는 시대가 오는 보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집 마님이 김치 담그는 법이나 알런지 모르겠다.

딸들에게 김치 제조법을 전수하지 못할까 걱정이라 했더니 웬 조선 시대 꼰대 같은 소리를 하냐며 나를 외계인 보듯 한다.

정말 나만 이상한 건가?


큰딸은 결혼을 해서 미국에 산다.

사위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계 미국인이고 사돈어른들은 중국인이다.

시댁에 가면 중국 전통인지 대개 시아버지나 시숙 등 남자들이 요리를 하신단다.

그래도 며느리라고 콩나물국을 한번 끓여 드렸 시아버님이 을 보시고는 어째 밍밍한 게 맹물 같냐고 하시더란다.

원래 한국에서는 콩나물국은 이렇게 맑고 시원하게 끓인다고 하니 싱거워서 안 되겠다며 국에다 삼겹살을 넣 아예 돼지국을 만드셨단다.

콩나물국에 삼겹살이라니 기겁을 하겠는데 너는 요리하지 말고 그냥 쉬어라 하시더란다.

한국에서처럼 매운 고추가루 양념을 안 쓰니 그냥 허연 닭발을 맛있다며 뜯고, 선지가 둥둥 떠 다니는 허연 고깃국을 먹으라 하니 느끼해서 미칠 지경이란다.

결국 딸들은 시댁에서 음식을 배우면 되나 보다.




요즘은 1인 가구가 늘면서 자극적인 배달 음식이나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젊은이들이 많다.

밀키트나 냉동식품들이 워낙 다양하게 나오다 보니 이젠 마님도 점점 편리함에 익숙해져 간다.

밑반찬들도 반찬가게에서 다 만들어서 파니 굳이 직접 만들 필요가 없고 냄새난다고 집에서 생선도 굽기를 꺼려한다.

마트에 가면 먹고 싶은 것은 많은데 묶음 판매를 하니 냉장고는 터져 나가고 우리 집 엥겔지수는 항상 높다.

그래서 늘상 저녁은 냉파(냉장고 파먹기)를 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파스타에 멘보샤가 한 식탁에 오르는 국적 불명의 퓨전 요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집밥은 밖에서 돈 주고 사 먹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인근 치과 원장들과의 점심 모임에서 가장 자주 가는 곳도 '할매국수집'이다.

허름한 함바집 같은 곳이지만 두 분의 할머니들이 국수뿐 아니라 다양한 가정식 백반 메뉴를 제공한다.

반찬과 찌개, 국 종류는 그날그날 장을 본 데 따라 매일 달리 나온다.

그야말로 할머니표 오마카세인 집밥천국이다.

이곳에서 비로소 집밥을 먹게 된다고 하니 다른 원장들도 나랑 사정이 별반 다를 게 없나 보다.


백종원 씨나 차승원 씨 같은 분들 때문에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요리는 으레 남자가 하는 걸로 인식되는 것 같다.

'흑백요리사'같은 요리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상위 랭커는 다 남자들이다.

그러니 이젠 남자가 요리를 해야만 는 시대다.

누라가 며칠씩 여행을 가더라도 줄창 곰국만 먹기 싫다면, 혹은 라면이나 냉동식품 같은 인스턴트 음식 말고 제대로 된 집밥을 먹고 싶다면 TV나 유튜브에 요리법이 차고 넘치니 배워서 직접 만들어 먹으면 된다.

여태껏 평생 마누라한테 얻어먹었으니 이제 한 끼 정도는 해 먹일 때도 됐다.

그래서인지 치과의사 동창회에서 최근에 쿠킹 클래스를 개최한 적이 있었는데 기러기들과 나 같은 중년들이 많이 참가했다.

호응이 좋아 매달 하자고도 하고 김치 담그는 법도 배우자고 한다.


각종 먹방과 요리 프로그램 등을 통해 다국적 레시피들이 이젠 낯설지 않다.

지난해 태국 여행을 갔을 때도 똠양꿍, 쏨땀, 팟타이 등 태국 음식들은 국내에서 이미 접해봤던 거라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방콕 야시장에서 먹었던 악어 고기와 타조 고기는 다 토하고 고생했다.

K-food 열풍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된 지금, 외국인들이 김치를 찾고 만들기도 하는데 오히려 한국인들은 김치를 먹지도 않고 만드는 법도 잊어버릴 것 같다.

한식을 안 먹으니 쌀 소비량도 줄고 피자에 피클처럼 김치는 라면 먹을 때나 먹는 정도가 되었으니 김치 종주국으로서 위상이 말이 아니다.




아내는 요리를 하면 맛이 어떤지를 꼭 물어는데, 어떤 대답을 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기가 힘들다.

맛이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좀 더 연구를 해서 맛있게 만들면 좋으련만 싸늘해져서는 앞으론 그 요리는 안 만들겠단다.

그래서 그냥 맛있다고 하면 이젠 줄창 그것만 해준다.

착한 우리 아들은 엄마가 해준 음식은 다 맛있다면서 잘 먹는다.

아들이 맛있다고 한 토스트를 특히 자주 만드는데 그 바람에 우리 아들은 한 달이면 일주일 정도는 토스트만 먹게 된다.

오늘은 마님이 바빠서 저녁을 급하게 차리느라 가지무침에 된장찌개, 포장김만 내놓고 1식 3찬만 겨우 맞췄다며 미안해하는데 나는 오히려 계속 이렇게 한식 백반으로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keyword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