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미팅에서 처음 만난 어색한 남녀의 단골 멘트는 서로의 취미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 대개는 '독서'가 상투적인 답이었다.
비록 한평생 사는데 바빠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해도 옛날 노인들처럼 말년에 장기나 두면서 소일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취미생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림도 그리고 악기 연주도 해보지만 무얼 해도 반짝 불꽃처럼 타오르다 그만이다.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 상도 타고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나의 사위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게 취미라고 한다.
문제가 어려울수록 풀고 나면 희열을 느낀다는데 나는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결국 '독서'밖에는 답할 게 없나 보다.
확실히 책은 좀 많이 읽는 편이다.
화장실에서 엉덩이 까고 앉아 감동적인 문장에 눈물 대신 오줌 한 줄 주룩 할 땐 괜시리 책에 미안함도 들지만, 언제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도록 집안 곳곳에 책을 둔다.
아내가 하도 잔소리를 하기에 이젠 책도 마음대로 못 사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본다.
아내는 대학 다닐 때 교지에 단편소설 발표도 하고 명색이 문학을 전공했다는 사람이 소설나부랭이는 좀 그만 보란다.
이렇게 아내의 문학적 감수성이 세파에 무뎌진 반면, 요즘은 내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우연히 웹진에 에세이를 연재하고 브런치를 통해 글을 발행하면서부터 글쓰기가 비로소 나의 진정한 취미가 되었다.
시중에 나와있는 많은 글쓰기 비법책들을 보며 공부도 많이 했다.
대부분 반복적인 내용이 겹치는데,
'많이 읽어라. 메모해라. 매일 써라. 필사해라. 초고는 쓰레기니 퇴고를 반복해라. 자기만의 집필공간과 루틴을 지켜라.'등등.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있지만 새로이 알게 된 비법들은 시키는 대로 해 보았다.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기에 실천을 해보니 어떤 작가의 책은 페이지마다 온통 필사할 곳이다.
책 한 권을 아예 통째 베껴써야 할 판이다.
급기야 스마트폰으로 페이지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을 필사를 해보면 마음 속 깊숙이 스며드는데 중독성이 있어 필사 노트만도 벌써 여러 권이다.
이러다가 자칫 작가의 문체나 스타일을 흉내 내게 될까 염려스럽다.
대여해 읽은 책이라도 울림을 주는 책은 새책으로 구입해 마음껏 밑줄 긋고 접기도 하니 필사할 필요가 없어 세상 편하다.
매일 글쓰기를 습관화하라는데 이것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본업이 있는지라 전업작가도 아닌 데다 퇴근하고서도 아내가 아직 멀었냐고 하면 지체 없이 덮어버리고 같이 놀아준다.
아내가 심심하지 않게 술도 같이 한 잔 하고 등도 긁어줘야 한다.
절박함도 없고 작가 정신도 부족한 한심한 상태지만 나는 글쓰기가 집착이 되지 않고자 한다.
종이책으로 발행하고픈 바램이야 있지만 큰 기대는 안 한다.
인세를 받아 글로소득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그저 내가 좋아서 즐기는 취미생활인만큼 더 소중한 가치엔 자리를 양보한다.
즐거워야 할 글쓰기가 밥벌이가 되어 억지로 짜내야 하는 고역이 된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저 생각이 넘칠 때마다 글로 담아 놓는데 아직은 주워 담기 바쁘다.
글쓰기 이전에는 신선한 자극이 없는 반복적인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자세히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다 보니 매 순간이 경이롭다.
운동을 위한 아침 등산이나 점심 때 산책 등 적당히 몸을 움직이는 혼자만의 시간에 많은 아이디어들이 떠 오른다.
심지어 목욕 중에 '유레카!'를 외칠 뻔한 경우도 많다.
그러니 평소에 글감이 번뜩일 때마다 스마트폰에 메모만 열심히 해 놓는다.
그리고 주말이나 연휴 때 나의 집필실인 선바위도서관에 가서 집중적으로 한 두 꼭지씩 쓴다.
메모는 스마트폰 앱에 문장 단위로 쓴다.
단어 위주로 메모를 했더니 나중엔 키워드만 보고는 생각이 안 날 때가 많았다.
문장으로 메모를 하다 보면 서너 줄 이상 쓰기도 하고 그분이 오실 때면 앉은자리에서 아예 한 단락을 쓸 때도 있다.
앞 문장이 뒷 문장을 물고 오고 실타래 풀리듯 이야기 전개가 저절로 써지는 경험을 한다.
어떤 땐 주제에 맞는 몇 개의 메모 단락들만 추려서 적절히 순서를 배치하고 연결만 해도 거뜬히 한 꼭지를 완성할 수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아무 관계가 없는 메모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무슨 화학작용처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로 탄생하기도 한다.
그러니 메모가 어쩜 매일 글쓰기가 되는 것이겠다.
나는 아날로그 세대이자 디지털 세대라 일단 초고는 종이에다 연필로 쓴다.
마음껏 지우고 황칠도 하면서 화살표로 문단 순서를 재배치하기도 한다.
고치고 지운 흔적이 종이에 그대로 남아있어 어떤 글을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고쳤는지 알 수 있다.
나중에 퇴고를 할 때 고친 글자와 고치기 전 글자를 다시 비교하면서 고민해 볼 수 있어 좋다.
A4 용지 네댓 장 정도의 초고는 그야말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걸레다.
이를 퇴고를 해가며 스마트폰에 타이핑을 하는데 A4 용지 두 장이나 한 장 반 정도로 압축한다.
거의 반 이상 버리는 거다.
나는 노트북 자판은 서툴지만 스마트폰 타이핑은 천천히 말하는 속도의 수준은 된다.
평소 무수한 카톡질로 단련된 실력이다.
그렇게 완성된 꼭지는 두고두고 볼 때마다 퇴고를 하는데 끝이 없는 것 같다.
퇴고하다가 아예 새로운 아이디어를 넣는 경우도 있고 발행 전까지도 퇴고할 게 보인다.
요즘처럼 책을 안 읽는 시대에 내 글을 읽게 하고 심지어 돈을 지불하고 사 보게 하려면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얘기를 나름의 감상에 빠져 주절대는 건 일기나 다름없다.
책 안 보는 아내가 내 글을 판단하는 좋은 지표가 된다.
내 글을 본 아내는 이왕 쓸 거면 의사이면서 웹소설을 쓰는 어느 유명 작가처럼 대박 나는 웹소설을 써 보라고 한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는 뜻이다.
감수성이 메말라 굳어버린 가슴을 물컹하게 할 뭉클한 감동도 없는 모양이다.
브런치에서 캐 오는 보석 같은 글들을 대하면 나는 늘 작아진다.
깊은 울림, 영혼을 치유하는 공감의 문장들 이런 아름다운 글을 짓는 작가님들의 능력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모름지기 창조적 예술은 적당히 결핍되고 외로움에서 나온다.
생에 대한 아쉬움과 고달픔 속에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신산한 삶, 아픈 영혼의 경험, 힘든 투병을 하시는 분들에겐 평범한 사람이 못 보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눈이 있는 듯하다.
이런 작가님들은 구르는 돌 하나,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서도 인생을 관조할 수 있고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다.
큰 굴곡 없이 비교적 안정된 중년에 접어든 지금의 나의 삶에서 어찌 절절한 사연이 나올까.
배 부르고 만족스러운 인생의 작가는 필사를 부르는 명문장은 결코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독자를 의식해 재밌고 감동적인 글이 되고자 항상 고민하지만 필력조차 역부족이다.
그래도 이 여정이 내겐 너무 재미있다.
글밭에 앉아 한 꼭지의 글을 완성해 가는 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
글쓰기를 하면서 아내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습관도 들었다.
예전에는 건성으로 듣거나 말을 자르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일부러 대화를 많이 유도하고 심지어 적절한 리액션으로 호응도 한다.
그래야 신이 나서 수다를 더 떠니까.
아내는 글에서 제발 자기 얘기 좀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함께 한 세월에 나눈 추억들이 얼만데 아내를 빼면 내 인생 논할 게 별로 없다.
아내는 거의 내 글의 주인공이고 아내의 수다 속에 소재가 펄떡인다.
글을 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가족이나 지인팔이를 하게 되어 미안할 따름이다.
이번 설에 어머니 댁에 갔을 때도 내 유년의 기억을 위해 어머니랑 평소 나누지 않던 대화를 많이 하고 왔다.
우리 집의 역사와 부모님의 로맨스 얘기를 신이 나서 하실 때 발그레 상기된 팔순 노모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가족들이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무심했던 나의 지난날이 후회되고 미안했다.
글쓰기는 관심이고 이는 곧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 보다 미안했다는 한 마디 고백이 더 큰 울림이 됨을 실감한다.
그러므로 내 글들이 비록 책으로 엮어지지 않는다 해도 나의 글쓰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