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입으로 먹고살까, 남의 입으로 먹고살까?
지난주 평일 하루 오후 진료를 휴진하고 방송국에 다녀왔다.
라디오 방송 출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울산의 모 라디오 방송에서 치과 상담을 해온 지가 햇수로 벌써 5년째다.
TV뉴스의 앵커이자 울산 지역에선 꽤 알려진 유명 아나운서가 우리 치과에 환자로 방문한 적이 있는데 치료를 마치고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에 출연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평소 환자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외국인이 환자로 올 경우에는 특히나 근엄해지는데 대체 뭘 보고 방송 출연을 제의하는지 의아했다.
혹시 본인이 다니는 병원마다 출연 제의를 하는 거라면 아마도 전신질환을 골고루 가져야 했을 테니 그런 식은 아니었을 거다.
방송 경험도 없고 실시간 생방송이란 점도 부담스러워 결정을 못하고 머뭇거렸는데 오후에 나른하고 졸리는 청취자들에게 활력을 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란다.
그저 욕만 하지 않으면 무슨 얘기든 수다 떨듯 편안하게 하면 된다기에 결국 수락을 하였다.
본격적인 상담에 들어가기 전에 남녀 두 분의 아나운서와 함께 대본에 따라 간단한 코믹 콩트와 퀴즈 문제를 낸다.
그 후로는 대본 없이 생방송 중에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청취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는 형식이다.
혹시 나도 모르는 돌발 질문이라도 들어올까 봐 방송 초기에는 늘 청심환을 먹어야만 했다.
하지만 두 분 아나운서들의 하이톤과 오버리액션으로 물 흐르듯 대화를 유도해 나가는 진행 솜씨 덕분에 지금은 어느덧 방송임을 잊을 정도로 낄낄대며 즐기는 여유를 가지게 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약속한 방송시간 30분이 후딱 지나버려 아예 치과 코너는 한 시간으로 연장해서 방송을 해오고 있다.
나는 청취자들의 덴탈아이큐를 높이기 위해 방송 때마다 그날의 주제를 정해서 심도 있고 집중적으로 다루고 싶은데 매번 주제와는 상관없이 식상하고 뻔한 질문들만 반복된다.
치과는 왜 아프냐, 무섭냐, 비싸냐는 질문은 항시 나오고 임플란트 관련 질문이 거의 대부분이다.
임플란트가 분명 획기적인 치료법이긴 하지만 많은 치료법 중 하나일 뿐이고 치과에서는 훨씬 다양한 치료들이 이루어짐을 알리고 싶다.
뿐만 아니라 요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먹튀치과, 이벤트성 덤핑치과, 자칭 양심치과, 과잉 진료 논란 등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
하지만 청취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내 얘기만 일방적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주제를 벗어난 반복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곁들여 흥미를 유발한 다음 재빨리 전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요령껏 유도해 간다.
케이블 TV방송의 건강 대담 프로그램을 보면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출연해 환자 체험 사례를 전하며 의학 지식을 전해준다.
유익한 내용이 많지만 특정 성분을 유독 강조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경우엔 그 해당 프로그램에서 한 두 채널만 옮기면 그곳에서 어김없이 그 성분을 원료로 한 건강 보조 식품의 홈쇼핑 광고를 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너무 자주 하고 노골적이다.
의사라는 사람이 방송에 가운 입고 나와서 제품 광고나 하고 매스컴을 통해 자기 과시와 병원 홍보를 해서 결국 돈벌이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이들을 우리는 일명 '쇼닥터'라고 부른다.
아마 이들은 출연료를 받는 게 아니라 돈을 내고 방송을 하지 싶다.
돈만 내면 100대 명의에도 이름을 올려준단다.
예전에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안다.
젊은 시절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대회에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심사위원이 되려면 주최하는 언론사에 상당 금액을 내야 했다.
그 대가로 진선미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심사위원 위촉패를 받아 병원 내 홍보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명백히 쇼닥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의학 지식과 상식을 얻되 쇼닥터들의 상업성에 현혹되지는 말아야 한다.
진짜 실력파 의사들은 소위 마케팅이나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재야의 은둔고수처럼 조용해도 입소문 듣고 오는 환자들로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하지만 상업성에 눈먼 의사들은 광고와 조회수를 먹고사는 매스컴을 들락거리며 환자들을 선동한다.
그들은 '일단 유명해져라. 그럼 당신이 똥을 싸도 찬양할 것이다.'라는 말을 신조로 여긴다.
연예인을 광고에 쓰는 것처럼 유명해지면 그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말이 대중의 관심과 신뢰를 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라디오 방송을 하는 것은 청취자들의 치과 상식을 높이고 치과가 무섭기만 한 곳이 아니라 친근함이 들도록 문턱을 낮추기 위함이다.
그로 인해 나 자신만의 이익이 아닌 전체 치과의사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에 있다.
물론 출연료도 당당히 받고 있다.
방송을 하고 나면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유튜브 링크를 보내 모니터링을 부탁한다.
내 친구들은 무슨 의학 상담이 이렇게 정신없고 시끄럽냐고 놀린다.
실시간 청취자 반응 중에 약속시간에 늦었는데 상담이 너무 웃기고 재밌어서 차에서 내리질 못하고 있다는 댓글도 올라온다.
집 사람은 역시 달변 허 선생이라며 방송이 체질이란다.
잠 깨우는 예능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거 같다.
나도 내 속에 소위 무대체질 '끼'가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봐야 나는 남의 입으로 먹고사는 치과의사이지 유창한 언변으로 자기 입으로 먹고사는 아나운서들에 비할 바이겠나.
다만, 말만 잘하는 치과의사가 아니라 말도 잘하는 치과의사로 방송도 잘해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