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까지 버리진 마
요즘 주부들의 살림을 도와주는 3대 이모님이 있으니 바로 세탁기, 청소기, 식기세척기 이모님들이다.
특히 로봇청소기 이모님은 참으로 신통방통한 것이 휴대폰 앱으로 설정만 해 놓으면 청소구역과 순서를 제어할 수 있고 스스로 충전도 하고 먼지통도 알아서 비운다.
이 화이트색 이모님이 우리 집에 온 후로는 진공청소기는 쓸 일이 없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보니 어디서 검은색
로봇청소기도 나타나 방방마다 이모님들이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아무리 편리해도 뭘 또 샀냐니까 돈 주고 산 게 아니란다.
아파트 재활용 창고에서 득템 한 거란다.
멀쩡한 걸 왜 버리나 싶은데 사용해 보니 알 것 같다.
구형이라 앱으로 제어가 안되어 청소 순서도 랜덤이고 장애물로 막아놓지 않으면 어디로 달아날지 모른다.
성능 좋은 신제품이 쏟아지니 멀쩡해도 버림받는 거다.
창고에 의외로 쓸만한 게 많다길래 아내랑 며칠 뒤져봤다.
뭐 죄지은 것도 아닌데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밤도둑처럼 늦은 밤에 몰래 갔다.
진공청소기, 밥솥, 스탠드, 보풀제거기 등등 꽤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스팀다리미 하나랑 교자상 두 개를 득템 했다.
특히 교자상은 마치 새것처럼 상태가 깨끗해 횡재했다.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 창고에 가면 명품빽이나 고급 정장 옷들도 심심찮게 나온단다.
자동차와 휴대폰 뿐만 아니라 요즘은 상품의 교체 시기가 무척 짧다.
풍요의 시대이기도 하고 마케팅이 부추기는 것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참지 못하는 조급증 탓도 있는 듯하다.
꼬인 인간관계도 찬찬히 매듭을 풀면 다시 예쁜 리본을 만들 수 있을 텐데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듯 쉽게 절교를 한다.
게다가 미니멀리즘의 유행으로 마구 내다 버리는 시대이다.
우리 집은 아들과 우리 부부의 세 식구만 살기엔 꽤 넓은 평수이지만 물건들로 공간을 잠식당해 그리 넓게 살지 못한다.
화분만 해도 거의 50여 개에 이르고 어항은 세 개나 된다.
이게 다 코로나 때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취미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 되었다.
식물은 그나마 절반이 줄어든 건데 폭풍성장을 하니까 개체 수가 줄어도 오히려 차지하는 공간은 더 늘어났다.
세 자짜리 대형 수족관에 여러 어종을 섞어놨더니 작은놈들이 자꾸 죽어 나가서 소형 어항에다 분리하다 보니 이만큼 늘어 버렸다.
코로나 이전에는 해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집안 대청소를 하곤 했다.
청소는 먼저 물건 버리기로부터 시작된다.
컴퓨터의 파일을 삭제하면 휴지통으로 이동된 거지 없어진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낡은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린 것은 그냥 쓰레기통에 담아둔 거다.
쓰레기통 비우기를 해야만 비로소 없어진다.
집안을 쓰레기통 취급을 해서는 안 되겠기에 미니멀리즘을 실천해야겠는데 버리기는커녕 남이 버린 물건조차 도로 주워 오니 물 건너간 것 같다.
마님은 시집올 때 가져온 식기들을 아직도 갖고 있다.
예쁘거나 값나가는 것도 아니라서 딸들도 외면하고 집에서 잔치할 일도 없는데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고 있다.
책도 처치 곤란이긴 한데 그래도 명색이 문학을 전공했다는 마님이 소설 나부랭이들은 좀 갖다 버리란다.
허리 32에서 36까지 옷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의 바지들은 어이할꼬.
다이어트해서 조금만 빼면 다시 입을 수 있을까 미련을 두다가 결국 32는 다 버렸다.
조만간 34도 버려야 할 것 같다.
예전에 우리 집은 동물농장이었다.
강아지는 물론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스터, 파충류 이구아나에 심지어 토끼까지 있었다.
토끼는 개처럼 짖지도 않고 퇴근하고 오면 내 무릎을 독차지하는 등 애교가 강아지보다 더 많아서 특히나 예뻐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얘들이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닌가.
햄스터는 어쩌다 새끼를 어미가 물어 죽이는 걸 보고 기겁을 한 마님이 천륜을 어기는 괘씸한 놈이라며 아파트 화단에다 방생해 버렸다.
이구아나는 스스로 탈출했다는데 징그럽게 생긴 게 기분 나쁘다고 입버릇처럼 저주했던 마님이 역시 방생했을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강아지는 털 때문에 마님이 알레르기로 고생하기에 고모님께 줬다.
나의 토끼는 아무 데나 똥을 싼다는 게 핑계였지만 실은 내가 너무 예뻐하는 게 꼴 보기 싫다고 마님이 앞산에 데리고 가 산토끼를 만들어 버렸다.
무슨 토끼가 똥을 가릴 거며 토끼한테까지 질투를 하다니...
식물도 예외는 아니어서 키가 천정까지 닿고 구부정하게 굽은 드라코가 보기 싫다고 지인의 카페에 보내버렸다.
이렇듯 나는 주로 물건을 버리려 하지만 아내는 맘에 안 들면 생명체를 가차 없이 내다 버린다.
이러다가 나도 혹시 내다 버릴까 겁나는데 아니나 다를까 똥오줌 못 가리면 요양원에 보내 버린단다.
물론 자기도 마찬가지로 치매 걸리면 식구들 고생하지 말고 미련 없이 즉각 요양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아들에게 무시무시한 당부를 한다.
'여보, 아무리 미니멀리즘이라 해도 나는 내다 버리지 마.
죽을 때까지 돈도 벌어오고 치매 걸리지 않게 건강 관리도 잘할게.
나도 당신 내다 버리지 않을 테니까 우리 건강하게 삽시다.
나 버리지 마.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