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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여자들과 아이돌

엄하기만 했던 아빠는 후회합니다.

by 허용수


내 처남은 딸만 둘을 둔 젊은 아빠다.

큰아이가 고약한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동네 병원을 전전하다가 대학병원 소아과 병동에 입원을 하게 된 적이 있었다.

당시 둘째는 태어난 지 100일 된 갓난아기였는데 큰애가 퇴원할 때까지 한 달 남짓 우리 집에서 돌보게 되었다.

꼼지락거리는 갓난쟁이와 기저귀, 우유병, 아기 욕조 등 신생아 용품들을 보니 새삼스러웠다.

집사람은 미안한지 다 늙어서 웬 고생이냐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퇴근하고 나면 아기는 오로지 내가 독차지했다.

똥 기저귀 가는 건 기본이고 젖병에 분유 타 먹인 뒤 트림 시키기, 아기 목욕 시키기, 밤중에 깨서 울면 안고 토닥여 재우는 일까지 힘든 줄을 몰랐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 키울 때보다 더 지극정성이었지 싶다.

갓난쟁이 조카는 이제 내 품에서라야 먹고 자게 되어 완전히 내 손을 타버렸다.

제 부모 품으로 돌려보낼 때 그 짧은 동안에도 정이 들어 많이 아쉽고 서운했다.

확실히 우리 아이들 키울 때와는 좀 다르게 너그러워진 것이 이게 아마도 애비와는 다른 할애비의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두 살 터울의 딸 둘과 늦둥이 아들을 두었다.

3년 전 시집간 큰딸은 아직 아기 소식은 없이 암컷 진돗개 한 마리만 키우며 딸처럼 애지중지한다.

저들이 놀러 갈 때면 우리 집에 개를 맡기면서 할아버지 말을 잘 들으라 한다.

사람 손주를 안겨주면 얼마나 예뻐할까만은 졸지에 ‘개 할배’가 되어 영 마뜩잖다.

개한테 애정을 너무 쏟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게 아닌가 싶어 ‘개 손주’가 더 밉다.

손주를 바라는 걸 보니 나도 이제 영락없이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

손주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동료 원장님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젊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인구문제의 심각함을 직접 느끼고 있다.

살기가 퍽퍽해지고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여건이 점차 어려워지니 젊은 사람들 탓만 할 순 없다.

하지만 힘들다고 부모가 되기를 포기하고 자기들 인생만 누리겠다는 생각도 염려스럽다.

결혼만 했다고 어른이라 할 수 있나.

자녀를 낳아 기르고 부모로서의 희생과 책임감을 느껴봐야 진정한 어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 나 역시 아빠 노릇은 처음이라 참 많이 부족하고 욕심 많은 엄한 아빠였다.

딸들이 사춘기 시절, 또래의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그러하듯 큰딸은 당시 유명 아이돌이었던 '동방신기'에, 작은딸은 '엑소'에 빠져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동경해서 앨범과 굿즈들을 사 모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점점 도가 지나쳐서 공부는 뒷전이고 의상이며 현수막, 피켓 같은 걸 밤새 만들어 서울이건 지방이건 새벽차를 타고 공연장마다 찾아다니는 거였다.

제 엄마 아빠 생일은 모르면서 동방신기 누구누구의 엄마 생일이 언제며 그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색깔, 취미 같은 뭐 이런 쓸데없는 것까지 죄다 꿰고 있었다.

하루는 작은딸이 하늘이 무너져라 대성통곡을 하길래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어이없게도 엑소 멤버 누구가 걸그룹 누구랑 사귄다고 그 난리를 떠는 거였다.

아무리 타일러도 도무지 폭주하는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자 애비로서 이건 가르쳐야 한다는 미명 아래 이성 잃은 짓을 하고야 말았다.

나름 충격요법을 쓴다고 그간 아이들이 애지중지 모아 왔던 가수들의 앨범과 브로마이드, 각종 굿즈들을 애들이 보는 앞에서 다 때려 부수고 찢어 버리는 등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아! 정말이지 지금 돌이켜보면 모래시계를 뒤집어서라도 되돌리고 싶은 만큼 후회스럽다.

그때 일로 트라우마를 받은 딸들은 지금도 아빠와는 속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어색한 사이가 되어 있다.

이제 성인이 된 딸들에게 그 당시 아이돌들이 지금도 그렇게 좋냐고 물보았다.

다 어릴 적 한때지 지금은 아무 관심이 없단다.

그러한 것을 나만 그저 나쁜 아빠가 되어 버려 억울하다.


지금 우리 집사람은 BTS의 열혈팬이다.

아들 같은 아이돌에게 '우리 정국이 오빠야'란다.

대형 브로마이드를 화장대 옆에 보란 듯 떡하니 붙여 놓고 이 오빠는 누구고 집은 어디고 학교는 어디 나왔고 등등 아주 줄줄이 읊는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는커녕 잘 들리지도 않는데 우리 마님은 그 어려운 안무를 다 외워서 출 줄 안다.

이 추운 날씨에 다들 군에 입대를 해서 혹독한 훈련을 받을 걸 생각하면 노심초사 걱정이 돼서 잠이 오지 않는단다.

참 나 뭐 이젠 그러려니 한다.

아무렇지도 않다.


과거 일본 아줌마들이 '욘사마'에 열광했듯이 BTS 덕분에 중년의 우리 마님이 갱년기를 무사히 잘 넘기고 있고, 우리 딸들의 질풍노도 사춘기를 잘 보내게 해 준 아이돌이 고맙다.

게다가 K-POP 문화를 선도하여 한국 경제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엔터주를 보유하고 있는 나의 주식 계좌까지 불려주고 있으니 이래저래 고마운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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