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 설화(흥부전)
2017년 6월, 가장 오래된 흥부전 필사본이라는 흥보만보록이 발견되었는데 지금의 흥보전과 다르다. 배경이 되는 장소가 충청, 전라, 경상도가 아닌 지금의 평양 서촌(순안)이고, 흥부가 가난하게 된 이유도 조금 더 구체적이다. 데릴사위 제도로 형제는 부자인 처가에 살게 되었지만, 흥부는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부자 처가에서 나와 가난하게 되었다. 또한 연씨와 박씨의 성씨였지만 무과에 급제해 황해도 개풍군의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된 자로 나온다. 흥보만보록의 발견으로 흥보전 이본 연구와 판소리의 생성지에 관한 연구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서사무가에서 확인된 것처럼 이야기는 소비자에 따라 변형된다. 흥보만보록도 특정 지역의 소비자에게 맞춰진 이야기라 생각된다. 판소리가 호남에서 많은 소비가 많이 이루어 졌을 뿐 다른 지역에서 판소리 공연이 없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창악으로 구비전승되다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것을 판소리계 소설이라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결합해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한 판소리계 소설 중에서 이야기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근원 설화가 존재하는 것은 흥부가와 심청가의 방이설화와 원홍장 설화다. 지금의 흥부가는 창자가 달리해도 내용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소리꾼들이 같은 문자로 된 대본을 보고 연습한 뒤에 대중 앞에 나서기 때문이다. 비교적 근래에 만들어진 서사무가의 심청굿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본이 완성되어 무당들이 공유해 동해안 지역 무속인들은 거의 같은 심청 풀이를 한다.
이야기를 소비했던 사람들은 소리꾼이나 무속인의 소리판이나 굿판에서만 들을 수 있었지만 개화기 시절부터 문자로 기록해 이야기를 집 안으로 들여오게 된다. 소리판과 굿판의 이야기를 글로 옮겨 새롭게 구성한 “연의 각이나 심청전”이라는 소설이 만들어져 가정 안에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글로 적히면서 판소리 대본은 이후 변형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완전한 이야기로 결정되기 이전의 근원 설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설화에서 소설로 어떻게 변형되고 완성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당나라(618 – 907년) 때 쓰인 유양잡조에 흥보전의 근원 설화로 알려진 방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국의 김가는 왕족으로 그의 먼 조상 중에 방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한 동생은 재산이 매우 많았다. 따로 살고 있던 방이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동생에게 구걸하곤 했다. 그런데 신라의 어떤 관료가 공유지를 줘 방이는 동생에게 누에와 곡식의 씨를 빌렸다. 그러자 방이 모르게 동생은 기를 수 없게 쪄 주었다. 고치 하나만 살아남았는데, 이것이 날마다 한 치 남짓 크더니 열흘 만에 소만큼 커져 몇 그루의 뽕잎을 먹어 치워도 모자랐다.
이 사실을 안 동생은 틈을 엿보다 형이 없는 사이에 누에를 죽여 버렸다. 그러자 다음날 사방 백 리 안의 누에는 모두 방이의 집으로 날아들었다. 나라 사람들은 죽은 누에를 “거잠(巨蠶)”인 누에의 왕으로 생각했다. 주변 이웃들이 모여든 고치를 길렀지만 다 기를 수 없을 정도였다. 곡식의 씨도 단 하나만 자라나 이삭이 한 자 남짓이었다. 방이는 이삭도 누군가 해를 입힐까 늘 지키고 있었는데, 새가 꺾어 물고 가는 것이었다. 방이가 새를 쫓아 여섯 리쯤 산으로 올라갔을 때 새는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날이 저물어 방이는 바위 옆에서 밤을 보내려 했다. 한밤중이 되자 달이 밝게 떠 있을 때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어울려 장난치는 게 보였다.
그중 한 아이가,
“너는 뭐가 필요하니?”라고 하자, 다른 아이가,
“술이 필요해!”라고 대답했다.
질문한 아이가 금 방망이 하나를 꺼내 바위를 두드리자 술과 술잔이 함께 차려졌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먹을 것을 줘”라고 하자, 또 방망이로 바위를 쳤다. 이번에는 떡과 국, 그리고 구운 고기 따위가 바위 위에 차려졌다. 한참 뒤 아이들은 차려진 술과 음식을 먹고 흩어지면서 금 방망이를 바위틈에 꽂아두었다. 방이는 몹시 기뻐하며 이 방망이를 가지고 돌아와 방망이를 치며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다. 방이는 곧 나라의 재력과 맞먹는 부자가 되었다. 방이는 동생에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하며 진주와 구슬 따위를 동생에게 넉넉히 챙겨 주었다. 동생은 누에와 곡식을 쪄 준일을 뉘우치며 형에게 말하기를 형에게 했던 일을 똑같이 자기에게 해주면 자신도 방망이를 얻을 수 있다며 그렇게 해 주기를 간청했다. 방이는 어리석은 일인 줄을 알았지만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동생도 누에를 하나 얻어 쳤지만 일반 고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또 낱알을 심자 한 줄기만 자랐고 익어갈 즈음 새가 날아가 물어가는 것이었다. 동생은 기뻐하며 새를 쫓아 산으로 들어갔다. 새가 들어간 곳에 도착해서 도깨비 떼를 만나게 되었다. 도깨비들은 전에 자신들의 금 방망이를 훔쳐간 자라며 화를 내며 동생을 붙잡았다. 도깨비들은 자신들을 위해 언덕 세 판(한 판은 세자 높이에 여덟 자 길이)을 쌓으면 보내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코를 한 길 길이로 늘여준다 하니 동생은 언덕을 쌓겠다 간청했다. 삼일 동안 굶주림과 고통 속에 쌓았으나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러자 도깨비들은 그의 코를 뽑아 코끼리 코처럼 늘어뜨려 놓고 돌아가 버렸다. 사람들은 괴이한 일이라며 떼로 몰려와 동생의 코를 구경했는데, 그것이 부끄럽고 분해 죽고 말았다. 그 후 자손들이 장난 삼아 이 방망이를 치며 이리의 똥을 요구하자 번개와 천둥이 치더니 금 방망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난했던 방이가 나라의 관료에게 땅을 받게 되고 그곳에 동생이 준 누에와 곡식으로 부자가 된다. 누에 치는 방법은 기원전 200년경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해졌으며 가야인 들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원래는 주라 했는데 명나라의 견이 유명해 명주라 불리게 됐고명주실로 짠 옷감을 비단이라 하는데 주로 왕실의 옷감으로 사용되었다. 누에에서 실을 뽑아낼 때에는 누에고치를 찐 다음에 실을 얻는데 설화에서 동생이 누에를 쪄서 준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곡식을 쪄준 부분은 의아하다. 찐 씨앗으로서 곡식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누에와 곡식을 쪄서 준 것은 어떤 의미인지가 방이설화 해석의 관건이다.
일본의 쇼토쿠태자(574년~ 622년)가 신라의 진평왕에게 선물 받은 미륵반가사유상(일본 국보 1호)을 모실 사찰을 진하승秦河勝이라는 신라 도래인이 세웁니다. 일본명 하타노 카와카쓰는 금관가야(김해) 출신입니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바다를 건너 일본에 망명한 사람이다. 가야를 국가가 아니라 부족 연맹체로 해석되어 신라인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 백제인들과 건너가 백제인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진하승은 일본의 오사케진자(大酒神師)에 농업과 직물, 술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815년 일본 왕의 명령으로 씨족 명부를 작성하게 된다. 명부는 황족을 시조로 하는 씨족, 일본 신화의 제신의 후예라 칭하는 씨족, 그리고 한반도나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 씨족으로 작성되었다. 그렇게 작성된 씨족 목록을 “신찬성씨록”이라 한다. 신찬성씨록에서 한반도 도래 씨족 중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영향력을 가졌던 세 씨족이 있다. 백제의 멸망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서부지역과 가야 남부지역 사람들의 씨족인 아야씨(한漢氏)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고마 씨(高麗氏), 아야 씨와 고마 씨 이 이전에 건너간, 가야가 병합되면서 일본에 정착한 하타 씨(秦)다.
“신찬성씨록”에 하타 씨는 진시황제의 후손이라 신고했지만 진시황제는 진秦 씨가 아니라 영(嬴)씨이고 이름은 정(政)이었습니다. 일본서기를 통해서 보자면 하타 씨가 제출한 가문의 내력은 지어낸 것이다. 학계에서도 중국과의 관계에 중심을 두었던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오오사케신사의 씨족 내력을 진시황제로 적은 푯말을 없애기도 했다.
일본 사서에는 나중에 도래한 고마 씨와 아야 씨가 주로 일본 정치에 참여했다면 하타 씨는 일본 토착민들과 결혼을 통해 현지화되었으며 직조기술과 농법, 술을 만들어 국가의 부와 맞먹는 부를 축적했다. 방이설화에서 누에와 곡식을 쪄 준 것은 직조기술과 술 주조로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기술을 통해서 큰 재산 축적이 가능했음을 하타 씨의 사례로 받아 들 일 수 있었을 것이다. 왕족이었다는 이야기 서두에 어울리는 사람은 또 가야인 이었던 김유신이다.
『김춘추가 김유신과 함께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가죽으로 된 공을 차는 놀이)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축국을 하던 중 유신이 고의로 춘추의 옷깃을 떨어지게 하였다. 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라는 두 누이가 있었는데, 전날 밤 보희가 남산 위에서 소변을 보니 금성(지금의 경주) 전체가 소변에 잠기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문희는 보희에게서 이 꿈을 샀는데, 옷을 수선하기 위해 보희가 방에 들어서자 코피가 나서 수선하지 못하였다. 대신 문희가 나서 옷을 수선하고 춘추와 가깝게 지냈다.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에 내왕하여 문희와 교제하다가 문희가 임신하게 되었고, 유신은 문희의 행실이 문란하다 하여 불태워 죽이려 하였다. 유신은 장작을 높이 쌓고는 불을 붙이니 그 연기가 하늘을 가득했다. 이를 보게 된 왕은 자초지종을 듣고 문희와 춘추를 혼인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김유신 설화에서는 옷을 수선해 왕자인 춘추와 누이를 혼인시키는 것으로 보아도 가야인 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직조기술이 좋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조선시대에 쓰인 동국여지승람에 김종직은 회소곡으로 옛 경주를 이야기한다.
회소곡회소곡會蘇曲會蘇曲
『서풍은 넓은 마당에 불어오고, 밝은 달은 화려한 집에 가득한데. 왕의 딸이 윗자리에 앉아 물레를 돌리니, 육부六部의 여자들이 대 떨기(무더기를 이루는 꽃이나 풀 따위를 세는 단위)처럼 많이 모였네. 네 광주리는 이미 찼는데 내 광주리는 비었구나. 술 걸러 놓고 야유하고 웃고 서로 농담하네. 한 여자가 탄식하매 일천 집이 권면하니, 앉아서 사방에 길쌈 부지런히 하게 하였네. 가베놀이(신라 유리왕 때 두 공주로 편을 나눠 길쌈을 하게 해 진 편이 음식을 장만하고 한가위 때 즐겼다는 놀이)가 비록 규중閨中의 예의는 아니지만, 오히려 다퉈 소리 지르는 발하跋河(줄다리기) 보다 낫구나』
김종직의 회소곡에서 길쌈이 신라에서는 공주까지 참여한 중요한 산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방이가 가공의 인물일 수는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누에와 곡식의 씨앗으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누에와 곡식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이야기에 사용한 것이다.
바위로 날아간 새
경주의 은을암이다. 이곳 은을암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 신모가 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치술령에 올라 죽은 남편이 있는 왜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몸은 바위가 되고 혼은 이곳 은을암으로 날아 들어갔다. 옛사람들에게 새는 하늘과 저승이라는 이계異系와 연결된 존재라 생각했다. 그래서 성스런 지역임을 상징하는 솟대에는 새가 조각되어 올려져 있다. 산으로 날아가 방이가 쫓아왔지만 바위로 새가 들어갔다는 것은 그의 노력이나 정성에 이계가 감응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 바위를 두들기자 마실 것과 먹을 것이 도깨비들에게 제공된다. 도깨비가 가지고 있던 금 방망이가 방이에게 주어질 것을 나타낸다. 이 금 방망이는 은을암에서 산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옛사람들에게는 무속에서의 무구로 해석될 수도 있다.
아이들 혹은 도깨비
전남 해남군 화산면의 열 고개다. 열 개의 고개를 넘고 넘어야 한다 해서 열 고개라 하기도 하지만 이곳에는 슬픔이 잠들어 있다. 아이들이 죽으면 이곳에 아이들을 묻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어린이 혹은 영혼을 뜻하는 “얼 고개”라고도 하고 밤에 도깨비불이 돌아다닌다 해서 “도깨비 고개”라 했다. 도깨비는 금기를 상징한다. 가족끼리도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 혹은 마을 사람들도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아이들이 묻힌 곳. 그래서 도깨비 고개는 마을 밖에 있다. 그런 곳에는 사람 사는 집을 짓지 않아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 있다. 간혹 귀농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곳에 집을 짓는데 마을의 금기를 건드린 것이다. 이유 없이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받기도 한다.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의 능향원에는 도깨비를 모시는 영감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마을 안으로 도깨비를 들였는데, 그 이유는 제주의 중산간 지역의 금기인 돼지고기를 해안가 사람들은 먹으려 했기 때문이다. 돼지고기를 먹은 도깨비가 마을 안으로 들어 옴으로서 마을 사람들은 돼지를 제례상에 올리고 마을 사람들도 먹게 되었다. 제주 해안가 사람들이 돼지고기라는 금기를 수용한 것이다.
도깨비가 등장하는 이야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누군가의 성공에 질투와 시기, 탐욕의 마음은 공동체의 금기를 어기는 것으로서 금기의 상징인 도깨비를 넣는다. 누군가의 성공을 그대로 따라 하면 성공은커녕 금기를 어긴 대가로 가지고 있던 것도 잃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근원 설화와 흥부전은 성공담이 다르다. 방이의 노력과 선함이 결합되어 성공하게 되지만 흥부전은 선함뿐이다. 선함에 감응한 하늘이 제비를 통해 박씨를 전달해 주고 그 박에서 금은보화를 얻는다. 도깨비라 할 수 있는 방이설화의 아이들은 흥부전에서는 많은 자식으로 된다. 노동력이 부의 원천이었던 농경시대에 많은 자식은 부의 축적을 예견하게 한다. 그래서 방이설화에서는 부의 가능은 기술이라면 흥부전에서는 많은 자식으로 변화를 주려 했다는 점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성리에는 흥부전과 아주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형 박첨지에게 쫓겨난 박춘보가 우여곡절 끝에 노승이 건네준 박씨를 심어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그의 무덤이라 추정하는 곳에서 춘보망제를 올리며 마을의 풍요를 기원한다.
이곳에서 흥보의 모델로 알려진 박 춘보가 부자가 된 이유에 관해서 두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근처에 사금을 채취하던 광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박 춘보가 금을 통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가능성과 노승이 건네준 박의 씨앗이라는 설이다. 박의 씨앗은 다르게 해석되는데 쉽게 키울 수 있는 박으로 다양한 요리를 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꼭 흥부가 성공할 필요는 없는 것이 박첨지는 농부들의 민란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고, 박 춘보는 죽은 형의 재산을 나눠주고 마을 사람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공의 마음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박 춘보가 되어 가난했을 때 자신을 도운 은인들을 잊지 않고 나눔을 베풀었던 것을 성공이라 했다면, 요즘 많은 부와 권력을 얻은 사람들이 성공담을 책으로 낸다.
책을 통해서 그의 성공을 그대로 답습하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따라 한다는 것은 자신의 타고난 개성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특성을 쫓는 일이다. 자신의 특성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지만 탐욕의 크기만을 키워 또 다른 성공을 찾아 떠돌게 된다. 옛사람들은 남의 성공을 보고 시기의 크기만큼 커진 자신의 탐욕이 불행에 이르게 한다는 가르침을 방이설화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