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는 우리여서였을까
정리가 없으면 시작도 없기에 다시 마주한 20대의 끝자락
나는 너를 만나러 가면서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절절했던 근 2년 가까운 시간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 어딘가에 묻어두어서인지
나는 네가 그래도 여전히 좋았었다.
사실 누구를 만나도 내 기준은 너였고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도 없고
이제는 곁을 지킬 수도 없어서
그럴 때마다 나는 체념하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정말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너는 그냥 그래서 어른이 되기로 했구나
다시 만난 너는 너무 어른이더라
다른 어른들처럼 너무 겁쟁이더라
비겁하고 용기 없고 보수적이고 이기적이고..
나는 그래도 내가 아는 네가
적어도 너라면 네가
그래도 너만은, 너라는 사람의 특성만큼은,
만약 뭐 외형이 바뀌었대도 그대로 일 줄 알았는데.
원래 사람들은 잘 안 바뀌니까.
나는 한 번쯤은 너를 다시 보고 싶었어,
얘기하고 싶었어.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 만나 수다 떨다 보면
다시 교복 입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래도 네가 잘 됐었으면 하는 지금 마음으로도
잘 지냈냐고 웃으면서 그런 안부는 물을 수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만나기까지 잘 되던 연락 너머에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깨도
갑자기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잠수를 타고 사라져도
솔직하던 어제와 모른척하던 오늘의 태도가 달라도
나는 그래도 너를 이해하고 싶었어
너는 솔직한 사람일 텐데, 일이 많이 힘들고 바쁜가 보다, 그런 현실의 각박함이라면 더 기다려주고 싶었어
나는 너를 다시 봐서 좋았어
반가웠어
근데 막상 내 눈앞에 서있는 너는
'더 이상 이제 20대 중반이 아니지 않냐는 말,
어느 순간 연애가 피곤하다는 말,
네 사람만 챙기면 다른 사람에겐 어떻든 상관없다는 말, 당연히 기다리게 할 거 같으니 못 버티겠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노력이라는 건 더 하고 싶지 않다던
진심 어린 사랑보단 하룻밤의 쾌락이 편한 게 자연스럽다던
이게 사실은 진짜 내 옷이고 내 모습일 거라던
그런 말을 하는 너는
정말 처음 보는 사람이더라,
그냥 내가 발에 치이도록 볼 수 있는 그런 찌들고 비겁한 어른이 다 되었더라.
그래서 너는 나를 그렇게 대했구나
나라서가 아니라 너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구나
다시 만날거란 기대조차, 바람조차 없이 나온 자리였어도
오랜만에 우리가 다시 본다는 것에
내가 너무 들떠있어서 더욱 그 낙차가 아팠던걸까
헤어지고 나서도 나를 한번 더 보기 위해 매일 성수동 카페를 몇 개씩 헤매고 다녔다던, 처음으로 나 혼자 가는 여행에 심심할까 봐 걱정된다며 계속 전화를 해주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이 눈이 빛나던, 옆에 있으면 아주 똑똑해서 존경스럽던, 매사의 모든 걸 소중하게 여기던,
그런 너를 이제 잃어버렸다는 게 슬펐어.
욕조차 못하던 내 친구가, 아주 순수하고 빛나던 내 중학교 친구가, 마치 30 넘어 돈과 여자 쾌락만 좇는 시니컬한 사람이 된 걸 본 기분처럼 마음 한편이 무거웠어.
너에겐 내가 힘든 기억이나 잊고 싶은 트라우마 같은 거였을까? 그래서 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렸을까?
그럼 꼭 내가 아니더라도,
이제 나한테는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이지는 말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나'여서가 아니라 '진짜 지금의 네가 그런 사람'이지는 말지.
이 모습들이 다 거짓말 일수도 있겠지,
내가 너를 어떻게 잊었는데, 왜 다시 나를 흔드냐,
는 방어 기제일 수도 있겠지.
오늘 나온 이유가 정말 정리하거나
아직 다시 잘 지내기 위함이라고 얘기하면서
"바뀐 연락처를 알려줬는데 이제 정리는 틀렸겠지 않냐"며 웃던 너에게
정말 이렇게 변했냐는 내 물음에
"다가오는 몇 명에 그다지, 더 거절하게 되어도,
아무리 우리가 모든 기준이 맞는 걸 알아도,
지나간 거니 이제 놓아줄 건 놓아주자"는
뒤 따라온 네 말만이 진짜 일 수도 있겠지
나는 너를 만나며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어
나는 뭘 바랐던 걸까
난 왜 변하지 않았을까
아니 난 정말 변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