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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로운 Jan 10. 2022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그곳에서 그 애를 처음 만났다.

첫사랑이라는 말에는 신기한 느낌이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라는 영화는 제목만으로도 듣는 순간 바로 여름의 계절로 돌아가는 기분을 주니까 말이다. 명작을 잘 뽑아내기로 유명한 대만영화들부터 우리나라의 너의 결혼식까지 모두 섭렵한 나는 자타공인 첫사랑물 마니아인데, 당연히 그해 우리는 이라는 드라마에 스물다섯 스물하나까지 모두 정주행 했음은 물론이다. 나희도 사랑해!


사실 얼마전 옆동네의 어떤 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내 수업 후기들을 보고 호감이 생겨 해당 학교 동아리 수업을 진행해주셨으면 한다는 제안이었다. 근 십년만에 첫 방문하는 고등학교라니. 은근히 떨리는 마음으로 재료를 준비하고 시간 맞추어 교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온 학교는 너무 최신식이 되었고 학생수도 절반이 되었다만, 아이들만큼은 여전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여전히 해맑고 전 시간이 체육이었는지 교실안은 여름의 열기와 땀냄새로 가득했다. 학교에 교생선생님이 오면 우리는 꼭 그맘때 애들답게 첫사랑 얘길해달라고 졸랐는데. 이 친구들, 나와 어느정도 어색함이 풀어지자 대뜸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본다. 역시 이맘때 애들이네!


그래. 이제서야 그맘때 선생님 또래가 된 지금, 내 얘길 하나 풀어볼까한다.


내가 그 애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비평준제로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동네에 살았다. 선 지원 후 시험으로 연합고사를 보고 중학교 내신 성적과 합산하여 합/불을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그곳에선, 선 지원한 학교에서 탈락하면 최하위권 학교의 미달 인원을 채우도록 배정받게 되어 있었다. 중학 내신이 최상위권 학교 턱걸이에 걸렸던 나는 안전하게 한 단계 낮추어 원서를 썼으나 연합고사를 전과목 4개밖에 안 틀리며 대박을 쳐 커트라인을 훌쩍 넘겼다.


아쉬운 상황에 상향지원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된 부모님은 1년의 유예기간 끝에 급기야 2학년 시작하자마자 때 옆동네로 이사를 가 분위기 좋은 평준화 고등학교로 나를 전학시켰고


그곳에서, 그 애를 처음 만났다.      


그 애는 내가 전학 온 반의 반장이었다. 선생님이 반장에게 전학생 잘 챙겨주라고 말하시긴 했는데 그 때문인지 학교 음악실, 체육관 위치 등 그 친구가 많이 챙겨주어 학교를 적응하는 데에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다. 우연히 집 방향도 같던 터라 하교하면서 학교의 규칙이나 친구들과 대해서도 나눌 기회가 많아져 우린 더욱 친해졌다. 야자시간에 교내 독서실 같은 것을 함께 쓰게 되면서 초콜릿이나 젤리 등의 간식을 책상에 두고 가기도 했다.


어느 점심시간, 배가 너무 불러 산책 겸 학교를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그 애를 발견했다. 그 애는 농구를 잘하고 또 좋아해서 점심시간에 체육관에서 자주 농구를 하러 갔는데, 남자애들에게 간간히 하는 “농구하러 가자~”는 말 이외에 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유니폼 입은 그 모습이 멋있어서 은근슬쩍 친구들과 함께 체육관 방향으로 자주 산책을 나갔었다. 우리 분단이 다용도 세미나실 청소를 맡게 되면서는 청소를 검토해주실 선생님을 불러간 친구들 덕에 간간히 단 둘만 남겨지기도 했는데, 괜히 멋쩍어 빨리 끝내고 가자며 다그치곤 했다. 혹은 증명사진을 교환하는 친구들 사이에 얹혀가며 우린 친구지-.라는 말을 핑계 삼아 은근슬쩍 그 친구의 사진을 받아다가 학생증에 끼워놓기도 했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훗날 썸이라고 불리울) 시간들을 지나고 어느새 벚꽃이 다 만개해 떨어지기 직전이 되었다. 그날따라 가위바위보를 하자더니 내 가위에 보자기를 내어져 버린 그 친구가 웬일로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안 그래도 깜깜한 언덕으로 집에 가는 길이 꽤나 심심하던 터라, 그날 저녁 나는 조금 심심하지 않게 집에 가던 중이었다. 우리 집으로 가는 아파트 단지 언덕길 옆엔 길을 따라 핀 벚꽃나무와 함께 앉아서 쉴 수 있는 약간의 벤치가 있었다. 한참 걸어 올라가다 그쯤 도달했을 때 그 친구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하필이면 야자에 지친 마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벚꽃 때문이었는지, 또 혹시는 밤이 너무 깊어서였는지, 나를 좋아한다는 말에 그 시간이 영원 같은 기분이었다.


그 길로 집에 들어와 쿵쾅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부모님 몰래 밤새워 통화하고는 학교에 가서 내내 졸았더랬다. 이후 반 친구들에게 걸릴까 봐 조마조마하던 며칠을 시작으로 몰래 내 머리를 쓰다듬고 가기도 했고 이동수업 때는 살짝 손을 잡았다가 스쳐놓기도 했다.


 여름방학엔 함께 자습실을 신청했는데, 어느 날 그날따라 공부가 너무너무 하기 싫은 거다. 점심을 핑계로 담을 넘어 떡볶이를 먹고 오니 졸음은 쏟아지고 까만 건 글씨요 흰 건 종이요 하던 타이밍에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음악실 키를 갖고 와서 눈앞에 내밀었다. 지금과도 다를 바 없이 당시에도 나는 노래를 좋아했는데, 다행인지 그 친구는 피아노를 좋아했다.


그 당시 한 팝송에 꽂혀 mp3가 닳도록 듣던 노래가 있었다. 바로 그 노래의 악보를 구했다며 쳐줄 테니 불러달라고 내 손을 잡아끌고 음악실로 올라갔다. 그 애는 얼떨결에 올라와 피아노 앞에서 멀뚱이 선 나를 옆에 앉히고 건반 하나하나를 눌러주기 시작했다. 내 손위에 포개진 그 친구의 손을 매우 컸고 한 여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흰 커튼은 바람에 나부끼고. 언제 선생님이 올 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또 스릴 넘치는 재미에 우린 킥킥대며 웃었다.


자주 붙어있는 만큼 때론 다신 안 볼 것처럼 싸우기도 했고 때론 서로의 가장 좋은 친구기도 했다. 시험기간엔 자리를 맡아주고 졸릴 땐 깨워주고 필기를 나눠보며 서로의 미래를 응원하며 2년가량을 만났다.


그러다 고3이 되어선, 이미 우리의 교제를 알고 있던 담임선생님이 각자의 부모님을 호출하셨다. 이대로는 대학 진학에 무리가 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나는 중학교 이후 바닥 쳤던 성적을 회복 중에 있었지만 그 애의 성적은 점차 하락하고 있었다. 부모님을 속이고자 일단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쳐 놓고 일주일에 한 번씩만 데이트를 하자는 약속을 했다. 학교에서도 거의 아는 척하지 않으며 수험생의 본분을 지켰다.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우린 더 예민해졌고 가끔 보는 날에도 싸우는 일이 잦아졌으며 한 주에 한 번만 보자는 약속은 2주가 되기 일쑤였다. 각자 예민함이 더 해지다 9월 모평이 끝나 수시 원서를 쓴 무렵, 그 친구가 다시 나를 불렀다.


“우리 이러는 거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수능 끝나고 어른이 돼서 다시 보자.”

그러나 모든 첫사랑이 그렇듯 우린 보지 못했다.


나는 재수를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그 친구는 성적 그대로 진학을 하기로 하면서, 우리에겐 1년의 공백이 생겼다. 만남을 기약하기엔 이미 서로 충분히 권태로웠고 신입생이 된 그 친구에게 재수생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리라.


너넨 다시 만날 줄 알았다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다시 만날 줄 알았던 내 헛된 바람을 뒤로하고 재수를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 해 봄, 그 친구의 페이스북에 여자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어서 그 길로 차단을 하고는 한동안 교류가 없었다. 간간히 친구들을 통해 들은 그 애의 담벼락에 여자 친구와 찍은 사진이 내려간 걸로 보아 헤어진 것 같다, 그 이후 어떻게 사는지 안 올라와서 잘 모르겠다, 등등의 소식만 전달받을 뿐이었다.


사실 정작 수업땐 이렇게나 썰을 다 풀지는 못 했지만 대학교때나 회사동기들이랑 술을 먹다가 말이 나와 여기까지 얘기하면 다들 혹시 다시 연락오면 만날거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나면 서로 미련이 남아 어쩔 줄 모르며 다시 이어지던데 너는 어때?"


그러나 지금 나에게 다시 만나겠냐고 물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와 지금의 내가 연애관이 많이 바뀌기도 했고 그런 감정들 만으로 사랑을 이어가기엔 현재는 매우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때의 우리의 방향과는 너무 많이 멀어졌고 가고자 하는 방향도 위치도 너무나 다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작품 같은 조각 장면을 선물해 준 그 애에겐 매우 고맙다. 사람에게 추억할 무언가를 남겨준 다는 것은 어쩌면 선물이지 않을까 싶어, 만약 시간이 흘러 나중에 동창회라도 해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 덕분에 내 청춘이 조금은 반짝이고

조금은 더 재미있었어.

고마워, 우리 더욱 더 앞으로 가자.

행복하길 바라,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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