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나에 대하여
"왜 굳이 이 직업을 택했어?" 라는 수많은 질문의 답
오늘이 마감인 보고서 네다섯 개를 급하게 정리하고 드디어 집에 오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엊그제 널어놓은 빨래,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설거지와 오늘마저 돌려야 하는 옷과 이 이불더미 같은 것들.
서울에서 혼자 지내면서 내가 오롯이 감당할 몫이라는 것은 어떠한 대단한 1인 가구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성공에 대한 열망이라기보단 루틴한 이 일상이 휘청거리지 않도록 내 역할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것에 가까웠다.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는 쳇바퀴 같은 삶을 지내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나, 싶은 현타에서 나를 끌어올려주는 건 언제나 나의 천성에 관한 객관적인 분석 쪽이었다.
"나 지금 그만두면 다른 일 하고 싶은 거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타깝게 또 단호하게 no다.
그렇다고 내 일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여느 회사원이 그렇듯 그저 조직의 일부 구성원으로서 일 할 뿐이다.
그렇다면 누구는 진정한 나의 의미와 울림을 주는 일을 찾으러 떠나라고 얘기할 수도 있으나, 나는 내가 인류 평화와 사람들의 행복 또는 사회의 안정과 건강 뭐 이런 것에 이바지할 만큼의 대단한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꿈과 목표 또한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일개 회사원으로서는 신기한 일이지만,
입사 전에도 후에도 나는 지금의 일을 좋아하고, 이 일 이외의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와 평범이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평범한 회사원 직업군 내에서 자아실현을 어느 정도 하는 것은 꽤나 내겐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내 일이 대단하게 누군가에게 울림을 주거나 이바지하여 만인의 목표가 되는 직업은 아닐지 모르지만, 냉철하게 생각했을 때 난 이 직업이 나를 정말 잘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여태 꿈꿔 왔던 '하고 싶은 일'과 그리 대조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책을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서 나서서 말하기를 좋아하여 집안의 예비 아나운서로서 어른들의 보배였으나, 아쉽게도 고등학교 사회책을 펴는 순간 불현듯 이과임을 깨달아 보배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 진로에 대해선 한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국내에서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문과를 택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도박이었다. 문과 과목의 이렇게 많은 글자를 머릿속에 넣어놨다가 기억 속 정확한 단어로 꺼내어 볼 자신이 없었다. 문과는 택하는 인원도 많고 글자도 많다는데 그중 내가 대단하게 뛰어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과 과목과 완전 담을 쌓은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사회과학보단 순수과학이, 그중 물 흐르듯이 차곡차곡 머리에 그림으로 그려지는 건 오히려 생물 쪽이었다.
이후 언어영역은 그저 책을 오래 읽어 들어온 습관으로서 나에게 두고두고 꺼내먹을 재산이었다. 공부를 하다 머리가 아프면 언어영역의 소설을 읽으며 환기시키고, 때론 시나리오 지문을 보면서 영화를 보듯 쉬었다. 그저 취미일 뿐 이걸 전공할 만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과학을 외우는 과목이라는 혹자들의 말엔 아직도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전공과 한 발짝 멀어진 지금도 생명을 다루는 생물 과목이야말로 가장 따스한 학문이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에 이끌려 4년 동안 나는 생물을 전공했으니까.
내가 느끼는 가장 따스한 학문의 현장 정보를 상대들에게 가공된 언어로 전달하는 일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나에겐 어쩌면 천직과도 같다. 사람을 대하려면 눈치도 필요하고 또 정보라는 것은 오해 없이 전달하는 것도 필요하니까, 나의 전공지식과 내 활발한 성격이 모두 다 담길 수 있는 이 직업은 미리 대학생 시절을 들여 찾아 준비하지 않았으면 이렇게나 만족하진 못 했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까지 처음엔 "왜 굳이 이 일을 선택했어?" 라고 물으면서도 "아 근데 너랑 잘 어울린다. "로 끝나곤 하니까.
나는 지금 여기가 나의 위치이자 나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일을 하면서 때론 힘들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항상 내가 딛고 선 자리를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했다.
오늘의 세심함으로 내일의 미래에 한발짝 다가가는 정보를 케어하는 사람. 대학시절 그렇게 총장님이 강조하며 여러번이나 만드시겠다는 문이과 통합형 인재가 바로 내가 된 것 같다는 말을 감히 덧붙여본다.
아, 적어놓고 보니 상당히 사명감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강조하지만 난 사명감없는 일개 회사원이다. 하루하루 월급날만 기다리고 있다. 정말이다.
또 모르지. 어느 날엔 갑자기 돈 많이 버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ㅋㅋ (물론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