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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로운 Feb 11. 2021

요즘 것들에게 취업이란

노오력으로 안 되는 것에 대해

내 첫 번째 회사 때문인지 두 번째 회사에선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로 회사원 이외의 다른 꿈을 꿔본 적이 없다. 냉정하게 진작 다른 쪽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도 못했거니와 사람 좋아하고 일 욕심 있고 전공이 명확하여 특정 산업군에 있는 특정 계열 회사들이 나의 목표였다.


 모든 대외활동과 자격증을 그쪽으로 모아 올린 뒤 운 좋게도 기업문화가 좋기로 소문난 내실 있는 회사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회사에 대해 눈이 높아져서 단순히 '회사란 이런데구나'라고 생각했다. 적응하는 데에 꽤나 어렵지 않았고 일 하는 것도 재밌는 터라 대학 내내 회사원만을 생각해온 나에게 회사원은 역시 잘 맞다며 증명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뉴스에서 취업난이라는 소리가 무섭게 나는 정직원 전환에 실패했고,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략한 지 두 달만에 집 근처 작은 중소기업에 지원해서 급하게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그 회사에 출근하던 첫날 느낀 내 마음은 그야말로 이랬다.
"다들 왜 ㅈ소, ㅈ소 하는지 알겠네..."

어쩌다 미루고 미룬 내 졸업식이 월요일로 겹쳐, 회사에 사전에 연락을 드렸더니 가발령받은 부서 전무님께 연결해 주셨다. 흔쾌히 가족과 시간을 보내라는 허락을 받아 미리 연차를 당겨 쓰고 화요일 첫 출근을 했는데, 그 해 이제 막 그 부서 부장으로 승진한 분(이제 퇴사했으니 남이다,,!)이 한마디 하셨다.

"요즘 애들은 졸업식이라고 입사 첫 날부터 연차를 쓰나 봐? 우리 땐 오후라도 얼굴 비추고 인사했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

그날 그나마 내가 왔다고 환영식 겸 해서 먹은 점심메뉴는 닭갈비였다. 처음 가는 식당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이미 자주 와본 막내 대리님에게 '숟가락 미리 놓기 미션'을 뺏기자 또 부장님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이런 게 다 사회생활이라고, 우리 막내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봐?"

자타공인 회사 및 조직을 너무 좋아해서 연구고 대학원이고 얼른 취직하겠다며 휴학도 유학도 안 해본 난데, 그 회사에 다니는 두 달 동안은 회사 가기 싫다며 울음 바람으로 다녔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해선 거의 매일 저녁 9시가 돼서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고 밥 먹을 힘도 없어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살았다. 그땐 본가에서 부모님이랑 살았는데, 기가 쭉 빠진 딸에게 해주신 멋쩍은 위로는 "그러면서 크는 거야, "셨다.

더 좋은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생전 처음 본 딸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셨을 것 같다. 얼마나 힘들까 싶으면서도 쉽게 그만둘까봐 두려우셨을 테고 '힘들고 어려운 세상, 강하게 키워야겠다'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지금 다니는 이 회사는 그 시절, 부모님이 뜯어말리시던 회사였다. 그때 공고가 난 회사들 중에선 그나마 낫지만, 그래도 회사 규모에 걸맞게 소문상 힘들기로 유명하여 꺼려지는 회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나에겐 어디든 그곳보다 나았다.

'적어도 이 작은 회사에서 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체계 없이 인수인계받는 것보다야 낫겠지.'

없는 지병을 핑계로 한 달 가까이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는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여 살았다. 떨어져서 그 회사에 계속 다닐까 봐 면접 때도 너무나 절실했다. 오죽하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면접을 보기도 했다.

우리 회사 최종면접 전 날, 그 회사에서 협력 건으로 거래처와 강남에서 외부 미팅이 있었다. 작은 회의실에서 두 시간가량 회의를 하는데 앞에 계신 분이 계속 허공에 기침을 했다. 건강한 상태라면 별 것 아닐 수도 있었지만 당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나는 직관적으로 바로 옮았고, 귀사한 오후부터 목소리가 맛이 가기 시작하더니 다음날 새벽부터는 아예 목소리가 안 나왔다. 이 핑계로 회사엔 오전 반차를 냈지만 마음은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오늘이 최종면접인데!

나의 마지막 기회조차 날릴 수 없다는 절실함으로 아침에 눈뜨자마자 유자 꿀물을 만들어먹고 약국에 가서 목에 좋다는 약은 다 사서 먹었지만 면접장에 들어올 때까지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패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당황하지 않으려 애썼다. 면접장에 들어와 다른 사람들이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은 최대한 경청하는 제스처로 어필하려고 했다. 내 질문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나마 겨우 겨우라도 대답을 하려고 했고 마지막 한마디가 있냐는 질문에 번쩍 손을 들었다.

" 경력자들 사이에선 전 회사에 레퍼런스 체크 같은 걸 한다고 들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제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제 역량을 다 못 보여드린 것 같습니다만, 제 이력서에 적어놓은 데로 인턴을 했던 회사에 전화하여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경력자는 아니지만 그만큼 저는 제 능력에 대해 자신이 있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제대로 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

목소리가 안 되니 어떻게든 안 나오는 말로 몸짓으로라도 전달하려고 애썼다. 나중에 같이 합격한 동기의 말로는 "언니 정말 간절해 보였다"라고 한다. 정말 간절했다.

"진짜 프로들은 몸 관리도 잘하는 법입니다 허허"
"... 죄송합니다..!"

이 말을 하면서 얕게 웃어 보이시던 게 혹여 탈락의 위로일까 봐 걱정했는데, 패기를 높게 사주신 덕인지 다행히 며칠 뒤 확인한 최종 합격자 명단엔 내 이름 석자가 올라와있었다. 그날 아침 엄마와 부둥켜 울었다.

누군가는 끈기가 없어서 내가 그 회사에서 그만두고 나왔다고 하겠지만 끈기와는 별개로 나는 내가 다져온 내 경험치를 그런 대우와 맞바꾸고 싶지 않았다. 누구와도 마찬가지로 졸업을 비롯해 입사 전까지의 나는 열심히 살았고 그 시간 동안 어렵게 쌓아 올린 나의 자존감을 그 돈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우리 엄마 아빠의 귀한 딸이었다.

일이 먼저이기전에 일 하는 주체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었고 그 두 달 동안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두 달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지금 회사에 와서는 '경력직도 아닌 게 신입도 아닌 포지션'에 적응하느라 힘을 썼다. 그러나 최소한 여기서 나는 '이해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더 잘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정에서 나온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던 듯하다.

우리는 엄마 아빠의 귀한 자식이지만 또 사회에서는 신입으로서 이 조직에 '누'가 안되기 위해, 살면서 때론 본인을 낮추는 과정에 있다. 나도 너무나 많이 돌아서왔지만 그 과정에서 모두가 본인을 너무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너지지 않아야 '잘 해낼 수'도 있다. 누군가 작은 것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잃지 않고 지켜가라는 조언이 나에겐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가령 친구네 고양이를 보는 시간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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