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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로운 Feb 10. 2021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그냥 일은 원래 그런 거다.

첫 회사 인턴을 하던 시절에 회사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마케팅부의 대리님이 해주신 말이 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3개월마다 현타가 올 건데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네가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달라질 거야.”

“헉, 그럼 현타가 올 땐 어떡해요?”

“주변에 많이 알려.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만들어.”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한 질문이었다. 단순히 성공한 선배의 꿀팁을 미리 알아내야겠다는 것에만 급급해했다. 그 후에 정말 3,6,9개월마다 현타가 왔다. 입사하고 연수를 끝낸 3개월 차에 처음으로 회사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첫 수습 발령을 받고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 하나만 가진 채 부서에 덩그러니 떨어졌는데, 한 달 동안은 내가 대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일과 내내 업무를 익히는 데에 급급했지만 막상 집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고 어떠한 기력도 남지 않았다.


체력이 남지 않으니 정신력이 약해졌다. 남들은 회사에서 대단한 가치를 찾고 심장이 뛰고 일이 내가 사는 이유라는 둥 본인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는데, 나 같은 경우엔 내가 그냥 시간 때우는 월급 루팡이 된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됐다는 느낌이 없는 데다가 성과도 내지 못하면서 괜히 선배들만 귀찮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 자존감 또한 바닥을 쳤다.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눈치가 보였다. 내 친구들은 복 받은 거라고 했지만 그 한 달 동안 나는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혹여 실수라도 하면 내가 팀원들에게 점수가 깎였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물론 다들 칭찬은 아끼지 않으셨으나 지적할 만한 것들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난 스스로 내가 망쳐질까 봐 걱정했다. '이러다 정말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떡하지. 난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사람들은 나를 혼내지 않지?'


1년이 넘어 진급 대상이 되면서 깨달았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었다. 나를 억지로라도 끌고 와 성장시킬 이유가 없다, 교육이 목적인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에 일일이 지적해 주는 것도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냉정하게, 회사에선 '굳이'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없다. 업무에 대한 가이드나 인수인계가 아니고서야 성장은 오로지 나의 몫이고 우린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일을 스스로 해내야 된다.


한 달 동안의 현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선배들한테 조언을 구하면서 그 대리님이 널리 알리라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생각했다. 신입이라는 위치 덕인지 이런 것을 물어보는 데에 그리 어렵지 않았고, 선배들도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신입이라서 그래.’ ‘금방 곧 적응될 거야.’ ‘다들 그래.’ 등등의 조언들 중 가장 도움이 됐던 말은 회사에서 자아실현 같은 걸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회사에서 이뤄낼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니, "회사에서 어떻게든 열심히 지내라"라고, "감히 큰 포부를 꿈꾸세요!"라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기대를 하지 말라니. 근데 지내면서 돌아보니 기대가 많은 사람은 실망도 많은지라 힘들어했고, 희한하게 기대가 없는 나는 꽤 오래 이 직군에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 실망하지 말라는 말이지 않았을까.


장류진 작가님의 책, '일의 기쁨과 슬픔'에 이런 구절이 있다.

"코드를 좀 멀리서 보면 어때요?
자기가 짠 코드랑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버그는, 그냥 버그죠. 버그가 케빈을 갉아먹는 건 아니니까."


미쳐버릴 것 같을 때엔 팀장님에게 말하고 카페에 다녀오기도 했다.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먹으면 일과 나, 상황을 한 발 짝 멀리 떨어져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퇴근하고 잘 정리된 내 방 침대에 앉아 무드등을 켜고 노래를 들으면 앞으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냉정하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가끔 연애가 일상의 축소판 같고 회사일이 꼭 연애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연애하다 보면, 너무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잘해보려고 할수록 괜히 오히려 더 멀어지고 더 실수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말은 기대가 없다고 했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을 뿐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럴수록 더 집착하고 조급해하는 마음이 덜어져 오히려 이 일을 즐길 수 있었다.


간간히 거래처에서 쉽지 않게 굴 때도 "그래, 일은 원래 이런 거지." 하고 툭툭, 퇴근하면서 OFF 버튼을 켜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 잘못에 대해 눈치 보고 울고 있기보다 먼저 조언을 구할 수 있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있던 일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과장님이 된 그 대리님과 커피 한 잔 하며 "감사합니다, " 하고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일은 원래 그런 거였다. 그걸 생각하니 6개월 때 좋은 부서에 새로 발령이 나 성과를 보여야 할 때도 9개월 때 새 프로젝트 건으로 새 거래처와 컨택할 때도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듯 잘 넘어가 지낼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견딜 수 있었다. 그게 지금도 내가 이 일을 오래 좋아하게 하고 회사에 계속 다니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냥 일은 원래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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